2021년 2월 4일 목요일

[범용기 제2권] (5) 해방 직전 “일제”의 발악상 - 조선신학원 문 닫고

조선신학원 문 닫고

 

조선신학원으로서는 이사장과 학장이 혁신교단으로 갔고, ‘조선신학원이란 간판은 감리교신학교와 함께 혁신교단 신학교로 개칭된 셈이다. 조선신학원은 없어진 것이다. 나는 설립자에게 사직서를 내고 뚝섬 내 집에 농성[1]하고 있었다. 사직 이유는 이렇게 밝혔다.

나는 조선신학원 설립자와 이사장의 초빙으로 교수직에 있었는데 이제 조선신학원이 없어졌으니 내 직책도 없어졌기에 사임서를 보낸다.”

이런 소문이 평양신학교에 전해졌다. 그때 평양신학교장은 채필근[2]이었고 교무는 청산학원 후배인 김덕준이었다. 하루는 김덕준이 뚝섬 내 집에 찾아왔다. 나를 평신교수로 초빙한다는 공문서와 생활비라면서 금일봉을 내놓는다. 봉급도 조선신학원의 배나 되는 액수였다.

 

나는 정색하고 말했다.

나는 신학을 상품으로 매매하는 신학장사치가 아니요. 내 일용할 양식은 하느님이 주실 것이니 그런 걱정은 말고 이 돈 봉투들은 도루[3] 갖고 가시오!”

그는 무안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동창이자 성격이 개방적이어서 기분 좋게 얘기하다 갔다.

 

어느 날 밤에 졸업반 학생들이 찾아 왔다.

우리는 선생님의 강의를 듣기위해 왔고 선생님도 우리를 가르치기 위해 오신 것 아닙니까. 교회 정치꾼들이 조선신학원이란 간판을 갖고 가든 말든 그게 무슨 큰일입니까? 나와서 가르쳐만 주십시오한다. 서정태[4]가 주동자인 것 같다.

학원의 법적 책임자는 설립자니까 설립자에게 말해 보시오하고 돌려보냈다.

이사장의 만나자는 통지가 왔다. 설립자는 김영철 장로고 이사장은 함태영[5] 목사님이었다.

나는 혜화동 김영철 장로 댁에 갔다.

조선신학원을 재건하자는 것이었다.

혁신교단에 간 전필순, 윤인구는 조선신학원 이사회록을 갖고 갔기에 그들은 자기들이 정통이라고 했다.

이사회에서는 결원된 이사를 보선했다. 일본인 무라기시’(村岸淸彦) 목사와 경성제대 법학부의 원로 교수이자 일본기독교 정동교회 현직 장로인 하나무라’(花村美樹)를 이사로 보선했다. 당국관계를 순조롭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사회에서는 나를 학원장으로 선정하고 학원 장소는 정동 무라기시목사의 교회당을 쓰기로 했다.

나는 승낙했다. 그리고 전필순과 윤인구에 대한 통고문을 초안했다. 그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우리는 조선신학원을 다시 시작한다. 당신들에 대한 우리의 문은 열려 있다.

돌아와 같이 일하자. 그러나 이달 ○○날까지 아무 회신이 없을 경우에는 우리와 당신들과의 관계는 단절된 것으로 알겠다…….”

 

일종의 최후통첩이었다.


[각주]

  1. 농성(籠城) - 요구 조건을 주장하거나 항의하려는 사람들이 집단으로 한데 모여 떠나지 않고 버팀
  2. 채필근(蔡弼近, 1885~1973) - 장로교 목사, 신학자, 교육가. 1885916일 평남 중화군 동두면 설매리에서 채옹빈의 독자로 출생. 그의 부친은 유학자였으나 1898년 같은 설매리의 채정민이 전도를 받아 기독교인이 되고 그가 다시 채씨 문중에 전도하게 될 때 믿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소장하고 있던 역술서를 태우고 가족 전체를 이끌고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수학하였고 어느 정도 유학에 미련을 두었던 채필근은 부친의 결정에 따라 마지못해 교회에 출석하다가 1899년 평양에서 길선주가 인도하는 사경회에 참석한 후 적극적인 교인이 되었고 그해 세례를 받았다. 그는 북장로회 리(G. Lee) 선교사에게 예배를 인도할 수 있는 권한을 위임받아 설매동교회가 설립한 용산리교회 설교를 맡아 7년간 봉사하였다. 1907년 평양 숭실중학교에 입학하여 1909년 졸업(6)하였고 숭실전문학교에 진학하였다. 이듬해 한일합방이 이루어지고 곳곳에서 결사대가 조직될 때 그는 여기에 참여하여 서울까지 올라와 전덕기 목사가 주도한 소위 대한문사건에 참가하기도 했다. 평양으로 돌아와 대성학교장 안창호의 지도를 받으며 숭실내에 청년학우회를 조직, 그 회장이 되어 민족운동을 벌이려 했으나 안창호가 해외로 망명하게 되자 결국 그도 학업을 중단한 채 1911년 북간도로 망명하였다.
    만주로 가던 중 회령에 들러 그곳에 있던 캐나다 장로회 선교사 바커(朴傑) 및 김영제 목사의 호의로 캐나다장로회 선교구역의 조사로 임명되었다. 그가 맡은 구역은 함북 경흥ㆍ경원ㆍ온성ㆍ종성ㆍ회령ㆍ부령 등지와 두만강 건너 시베리아 우수리에 이르는 지역으로 함북에 13, 만주에 20처 교회를 순회하며 돌아보았다. 이곳에서 10년 동안 시무하면서 20여 곳에 교회를 세웠고 성경야학교도 설립, 운영하였다. 1913년부터는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였고 1916년에는 경흥읍교회 장로로 장립되었으며 1918년에 신학교를 졸업(11)하였다. 그해 함북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고 경흥읍교회 위임목사로 부임하여 2년간 시무하였다. 1920년 캐나다장로회 선교부의 주선으로 일본 유학의 길이 열려 도일, 메이지학원 고등학부 문과(1923) 및 토오쿄오제국대학 문과(1925)를 졸업하였다. 일본 유학시절에는 토오쿄오 한국 YMCA 이사장을 역임했고 토오쿄오한인교회에서 설교했다. 졸업후 토오쿄오제국대학의 교수로 수차 초빙을 받았으나 이를 거절하고 귀국, 1년간 숭실중학교 강사로 있다가 1926년부터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취임하면서 문과 과장직도 겸임하게 되었다. 1934년 숭실학교가 신사참배문제로 난관에 부딪치게 되고 마침 교회 내분으로 혼란에 빠진 장대현교회가 그를 초빙하게 되자 학교를 사임하고 목회 일선으로 복귀하였다. 장대현교회의 문제를 수습해 나가며 4년간 목회한 후 서울로 이주, 1938년 이화여자전문대학교 교수로 초빙받아 2년간 다시 강단에 섰다. 그동안 평양 장로회신학교는 신사참배문제로 폐교되고 외국선교사들이 돌아가게 되면서 신학교육의 문이 닫히게 되자 그는 서울의 김영주, 차재명, 김대현, 함태영 등과 함께 조선신학원(현 한신대학) 설립운동을 벌여 19393월 조선신학원설립기성위원회를 조직하였고 그해 가을 승동교회에 최초의 한국인 설립 신학교를 개교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 학교가 이듬해 4월 정식 개교하기 직전, 평양에서 평양신학교를 재건하고 그를 초청하게 되자 평양으로 가 19402월 평양 장로회신학교(후 평양신학교라고도 함)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이후 해방되기까지 일제 말기 혼란중에 신학교를 지켜나갔으며 1943년에 종래의 장로교 총회가 일제의 종교정책에 순응,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으로 재조직될 때 그는 초대 통리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해방후 그는 신학교를 떠나 1946년부터 평양 창동교회 목사로 부임, 4년간 시무하였고 625사변 중 월남하여 제주도 서귀포의 피난민교회에서 목회하였고 1952년 부산 동광교회(현 서북교회)에 부임하여 목회하면서 동아대학 및 부산대학교 교수로도 봉직하였다. 1955년 부산장로회 신학교 교장에 취임, 6년간 봉직하였고 1962년 서울 동숭교회의 청빙을 받아 시무하면서 장로회신학대학, 서울여자대학 강사로도 나갔다. 대통령촉탁 고등고시위원(1952~60) 및 고등공무원교육원 강사(1963~66), 대한기독교서회 이사(1962~65), 숭실대학교 재단이사(1962~66)를 역임했으며 1966년 은퇴하였다. 은퇴 후에는 산돌교회(예장 통합, 서울 소재)를 개척하여 계속 시무하였고 1973317일 별세하였다.
    그의 사상적 입장은 지나친 보수주의도 아니고 지나친 자유주의도 아닌 중도적 입장이었다. 1920년대 일본 및 한국에 사회주의 풍조가 거세게 일 때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이론을 깊이있게 연구하여 기독교적 입장에서 이를 비판하는 강의와 강연을 하였고 1935년 송창근ㆍ김재준ㆍ한경직 등과 함께 집필자로 참여한 신생사의 <<단권성경주석>>의 신학적 입장이 장로교 총회에서 문제되었을 때 그는 즉시 사과문을 낸 일도 있었다. 유족으로 부인(朴德惠)과의 사이에 2(義順, 義春)이 있다.
  3. 도루 - ‘도로의 방언
  4. 서정태 목사 조선신학교 제7회 졸업(1948). 목포중앙교회, 전주중앙교회를 시무하였으며, 한국기독교장로회 총무(1957~1964), 한국기독교장로회 전남노회장(1966), 한국기독교장로회 제53회 총회장(1968)을 역임하였다.
  5. 함태영(咸台永, 1873~1964) - 장로교 목사, 독립운동가, 법조인, 정치인. 호는 송암(松岩). 19731211일 함북 무산에서 함우택의 아들로 출생. 어려서부터 한문을 배웠고 11세 때 서울로 이주하였으며 1895년 한국 법관양성소를 제1회로 졸업하였다. 그가 판사로 있을 때 독립협회사건이 일어났고 그는 사형이 언도된 이승만의 형량을 7년으로 감등시켰으며 이상재를 엄벌하라는 법무대신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그를 무죄석방시키기도 하였다.
    그가 기독교인이 된 동기는 그의 부친이 먼저 교인이 되어 연동교회에 열심히 출석한 데 영향을 받았으며 특히 1908년 복부내종으로 사경을 헤매던 중에 기도로 치료를 받고 그도 철저한 기독교인이 되었다. 이듬해 부친은 연동교회 당회장 게일의 처사에 불만을 품고 이원긍, 오경선 등 양반교인들이 따로 묘동교회로 분립하여 나갈 때(1909) 함께 나갔다. 그러나 함태영은 계속 연동교회에 남아 집사가 되었고 1911년에는 장로로 장립되었으며 1915년 경충노회 추천을 받아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18년 조사로 임명되어 남대문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였는데 당시 남대문교회 교인이던 이용설, 이갑성 등과 교분을 갖게 되었고 그는 이들과 이듬해 31운동 기독교측의 추진세력으로 활약하게 되었다. 그는 민족대표 48인의 한 사람으로 언급되는데, 사실상 31운동에 있어서 그의 활약이 없이는 기독교 각교파간의 연합 및 기독교, 천도교, 불교와의 제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19209월 경성복심법원은 손병희, 최린, 권동진, 오세창, 이종일, 이인환, 한용운 등과 함께 관련자들 중 최고형인 징역 3년형을 언도했다. 19211222일 최린, 오세창, 권동진, 이종일, 김창준, 한용운 등과 함께 가석방되어 풀려났다. 이후 신학을 계속하여 1922년 졸업하였고 그해 12월 경충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후 청주읍교회 위임목사로 부임하였다. 1923년 장로회 총회장에 피선되었고 1926년 충청노회장을 역임했다. 1926년 마산 문창교회에서 박승명 목사 사건으로 분규가 일어나 총회에까지 문제가 상정되어 그는 조사위원의 한사람으로 마산에 내려가 분규사건을 수습하였으며 이것이 인연이 되어 192712월 문창교회 위임목사로 부임하였다. 이듬해 경남노회장을 역임했으며 문창교회 문제를 수습한 후 192910월 연동교회 위임목사로 부임하였다. 연동교회 역시 노년층과 청년층 교인들 사이의 갈등으로 인한 교회 분규에 휩싸이던 터에 그가 부임하여 내분을 종식시키며 교회를 발전시켰다. 1929년 경기노회장, 1932년 경성노회장을 역임하였으며 1933년에는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1934년 박용희, 권영식, 전필순, 최석주 등 중부지역 기독교지도자들과 함께 YMCA 신흥우가 주도한 적극신앙단에 가입, 이를 통한 민족운동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서북계 교회지도자들과의 마찰을 일으켰고 이에 선교사 및 서북계인사들에 의해 지휘받고 있는 총회와 경성노회에 반발하여 경중노회를 따로 분립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결국 1937년 양측의 화해로 경중노회는 자진 해산되었지만 그 사이에 경성노회에서 파송한 강병주 목사가 연동교회 당회장으로 부임하고 교회 교인들의 의견이 나뉘는 등 적잖은 혼란이 야기되었다. 이같은그의 반선교사적 주체의식은 19393월 김대현, 김영주, 송창근, 채필근 등과 손을 잡아 조선신학원(후의 한국신학대학) 설립운동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리하여 1940년 조선신학원이 개교되었고 그는 이사장에 취임하여 순수 한국인에 의해 설립된 신학교 운영의 책임을 맡게되었다. 1941년 그는 전필순을 연동교회 담임목사로 선정하고 자신은 일선에서 은퇴, 원로목사로 추대되었으며 전쟁말기 일제의 혹독한 탄압을 피해 경기도 광주군에 내려가 은둔하며 둔전교회를 돌봤다.
    해방후 다시 교계에 복귀하여 1946년 조선기독교남부대회 부회장에 피선되었고 1947년 남부총회 부총회장이 되었으며 조선신학교 이사장, 기독교흥국형제단 총재, 기독공보사장을 역임하였다. 그밖에 일반 사회활동으로는 민의원을 거쳐 1949년 제2대 심계원(현 감사원의 전신) 원장에 취임하여 건국 초기 사회기강을 잡는데 헌신하였다. 625사변 중인 1951년 부산에서 피난중인 조선신학교 5대 학장으로 취임하였으며 이듬해 8월 정ㆍ부통령선거에서 제3대 부통령에 당선되어 본격적으로 정치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그가 부통령으로 재임하는 기간 중 한국신학대학(1951년에 개명) 학장직은 계속 보유하고 있었으며 조선신학교의 김재준 교수의 신학적 입장이 총회에 문제가 되어 결국 1954년 장로교 분열에까지 발전하였는데 한국신학대학 교수와 이들을 지지하는 교회는 기독교장로회(약칭 기장)를 형성하게 되었다. 부통령 임기가 끝나는 1956년 그는 이 대한기독교장로회(후의 한국기독교장로회) 41회 총회장에 피선되었으며 그해 캐나다연합교회의 초청을 받아 캐나다연합교회 총회에 참석한 후 구미 각국을 순방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정부로부터 건국공로국민장을 받았고, 1963년에는 중앙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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