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8일 월요일

[범용기 제2권] (44) 부산 피란 3년 - “한국신학대학”으로

한국신학대학으로

 

미군정 때에 이미 대학령에 의한 인가를 받았고 학사, 석사 칭호도 수여할 수 있었지만 이름만은 조선신학교로 불렀다.

다른 신학교들과의 균형을 유지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승만 박사의 피난정부도 부산에 있다.

백낙준 박사가 문교부장관이고 박창해[1] 씨가 비서실장이었기에 접촉하기가 자연스러웠다. 우리는 학교 명칭 변경서를 냈다. 며칠도 안 가서 허락됐다. 이제부터는 한국신학대학이라 부른다.

학칙에 따라서 학장을 선출해야 한다. 선출된 학장도 문교부 인허를 맡아야 한다. 문교부에서는 나에게 학장서리를 부탁한다. 지금까지의 직위가 교장이었으니 당연한 처사라 하겠다.

 

그 당시 함태영 목사님은 심계원[2]장 재직 중이었다. ‘심계원장은 일체 다른 공직을 맡지 못하는 것이 으로 규정돼 있었다. 그것이 민주주의 나라들의 통용 원칙이다.

그러나 함태영 옹은 자기가 이미 한국신학대학 학장으로 취임한 것 같이 생각되었는지 백낙준 박사에게 취임 인사까지 했다고 들었다. 백낙준 문교장관은 난처해졌다. 그래서 궁여지책[3]으로 지혜를 짜낸 것이 명예학장체제였다. 그것은 내게만 알린 비밀이었고 함태영 옹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함태영 옹은 내게 말했다. “속히 날짜를 정해서 학장 취임식을 성대하게 거행하도록 하시오.”

 

그리하겠습니다하고 대답했다.

 

명사란 이들이 모두 부산에 몰려와 있기 때문에 초청장을 수백 장 발송했다.

문교부에만은 알리지 않았다.

정대위 목사가 8군에서 얻어온 나무궤짝들은 못을 뽑아 널조각으로 변형시켰다. 베여버린 통나무 토막들도 미군에서 얻어왔다. 그것으로 마루바닥 푸레임[4]을 짰다. 그 위에 널빤지 붙일 못은 원래 궤짝에 박혔던 것으로 넉넉했다. 학생, 직원, 교수 총동원으로 하루 사이에 미끈한 마루가 깔렸다. 강단도 넓직하게[5] 짰다.

 

학장 취임식은 미상불[6] 성대했다.

 

이사회로서는 옹이 심계원장을 사퇴하기 전에는 학장실무를 맡을 수 없을 테니 노인의 명예를 구태여 긁어내리는 것보다는 노인의 소원대로 해 드리고 하회[7]를 기다려보자는데 합의했단다.

북진통일을 염원하는 이승만 박사는 휴전에 반대였다. 그러나 미국이 하는 일이니 이 박사의 권한 밖의 일이었다.

19516월부터 포로교환 협정이 토의되고 있었다. 포로수용소가 거제도에 있다. 담당 군목은 한신졸업생 강신정[8] 목사였다. 그때 나는 거제도에 자주 드나들었다. 강신정 군목의 증언을 들었다.

 

미군은 인민군 포로의 사상적 성분을 묻지 않았다. 통틀어 적군 포로로 인정하고 수용소에 넣는다. 민주 포로와 공산 포로를 한 반에 같이 수용한다.

공산 포로는 악착같이 원수 노릇을 계속한다. 민주 포로가 변소에 앉았을 때 돌멩이로 머리를 까서 죽인다. 시체는 변소통에 밀어 넣는다. 자는 동안에 목을 눌러 죽인다. ‘민주인민군은 그렇게 잔인하지 못한다. 몇 천 명의 공산 포로가 공동작전으로 그 짓을 하니 민주 포로는 다 죽고 말 것 같았다. 미군 책임자는 너희 동족끼리 그러는 걸 우리가 상관할 것 무어냐?’ 한다. ‘다 같은 인민군이 아니었더냐?’ 한다.

살려면 집단탈출을 해야 한다. 그래서 돌격대를 편성했다. 새벽녘에 문을 박차고 와아고함치며 밀고 나간다. 미군 감시원의 총에 몇 사람 희생됐으나 대체로는 성공적이었다.”

 

이것이 이 박사의 반공 포로 석방을 단행할 계기가 됐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 박사는 포로교환협정을 무시하고 반공 포로’ 27천명을 자의로 석방해 버렸다.

 

나는 USIS 도서실에서 그 후의 각국 여론들을 주워 읽었다. 영국에서는 Old Devil이 누구를 믿고 그런 방자한 짓을 했느냐하고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나 미국 여론은 일정하지 않았다.

 

이승만은 역사상 드물게 보는 big guts[9]”, “장개석은 그에게 어린애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8군 장성들도 이 박사 앞에서는 쩔쩔맨다.” 등등으로 추켜올리는 기사도 실려 있었다.

 

미군 군목이 자주 우리 신학교에 찾아온다. 하루는 누구던가가 그에게 원자탄 한두 개면 알아볼텐데 그건 뒀다 뭘하려는 거요!” 하고 대들었다.

 

미 군목은 대답했다.

참으로 용감하십니다. 지금 성능의 원자탄 한 개면 한반도는 없어집니다. 남이고 북이고, 인민군이고 국군이고 없습니다. 온전한 무인광야(無人曠野)가 됩니다. 그래도 원자탄을 써 달라니 참으로 용감합니다.”


[각주]

  1. 박창해(1916~2010) - ‘철수와 바둑이가 등장하는 초창기 국어교과서를 집필한 원로 국어학자. 1916년 만주 지린성 룽징(龍井)에서 태어난 고인은 연희전문학교(연세대의 전신) 문과에 입학해 외솔 최현배 선생에게서 국어학을 배웠다. 45년 광복 후 미군정청 문교부 편수사로 근무하며 서구의 언어학 이론을 도입, '철수와 영희, 바둑이'가 나오는 대한민국의 첫 국민학교 국어 교과서를 집필했다. 1952년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부임하였으며, 1976년 미국 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1988년 귀국하였다. 정대위 한신대 학장과 소학교 동기이다.
  2. 심계원(審計院) - 국가의 결산을 검토하던 헌법기관. 감사원(監査院)의 전신이다. 1962년 제5차 개헌 때 폐지되었다.
  3. 궁여지책(窮餘之策) - 매우 궁한 나머지 내는 꾀
  4. 프레임(frame) - 자동차나 자전거, 건조물 등의 뼈대
  5. 넓찍하다 - ‘널찍하다’(꽤 넓다)의 비표준어
  6. 미상불(未嘗不) - 아니라고 부정할 수 없게
  7. 하회(下回) - 다음 차례, 어떤 일이 있고 난 후에 벌어지는 일의 형태나 결과
  8. 강신정 1945년 조선신학교 제5회 졸업. 1980년 제65회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장을 역임하였다. 1953년 아버지(강병주 목사)와 형(강신명 목사)을 두고 한국기독교장로회 편에 섰다.
  9. guts : 용기 기력, 배짱, 인내력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