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8일 월요일

[범용기 제2권] (45) 忙中閑(망중한) - 진영의 강성갑 목사와 피란 교사들

진영의 강성갑 목사와 피란 교사들

 

신영희와 정자는 진영읍으로 갔다.

거기서 보건진료소를 차리고 시민들의 건강을 보살피고 상담한다. 전쟁 중에도 후방요원으로 인정된다. 한얼학교[1]에 몰려간 조향록, 이상철 등이 주선했다.

 

진영읍에는 강성갑[2]이란 이름의 비범한 인물이 있었다. 그는 연세대 졸업생으로서 교육의 혁명적인 갱신을 필생의 사업으로 삼고 헌신했다.

교육기관은 자주, 자립, 자치의 공동체라야 한다. 교사와 학생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어떤 부자의 기업체나 독재자의 사동’(使童)[3]이 아니다.”

교육은 바르고 깨끗하고 용감한 의 형성과 보육을 그 사명으로 한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 정신을 학교의 정신으로 선양했다. ‘하나님을 사랑하자, 이웃을 사랑하자, 흙을 사랑하자라는 삼애정신을 교훈으로 삼았다.

교육은 민주, 민권, 민족의 3각형적인 상호관계 안에서, 훈련과 실천과 성숙을 통하여, 그 주어진 사회에 봉사해야 한다.

따라서 교육기관은 성격 도야(陶冶)[4], 인간 건축(사람만들기)대장간이고 교사들은 대장장이다 등.

학교 이름을 한얼이라 불렀다.

을 의미한 것이고 크다는 뜻도 있고, ‘한국이란 뜻도 있고, ‘하나란 의미도 있다.

그는 진영읍 복판을 가로지은 철길 옆에 학교 터를 마련하고 거기에 천막을 쳤다. 혼자 천막을 지내며 니하까로 진흙을 실어다가 흙벽돌을 만든다.

짚을 썰어 섞었기 때문에 마르면 꽤 단단하다. 그것으로 교실을 짓는다. 한 교실에 한반씩 수용할 작은 교실들이다. 625 때까지에,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인가된 의젓한 학원이 됐다.

강성갑은 미국 프린스톤 신학교에 장학생으로 유학할 길이 열려 여권까지 받았으나 불우한 농촌 청소년들은 내버리고 갈 수 없다고 느껴 미국 유학을 포기하고 학교 건설에 전념했다. 그는 625 동란 중 지방 관리들과 경찰서 직원들의 모함에 의해 빨갱이로 몰려 모병왔던 현역 장교에 의해 낙동강가에서 재판도 없이 총살당했다. 그때 상철이가 피난하여 거기 있었단다. 강성갑의 동지 최 씨가 함께 총살당했는데 그는 수영의 명수여서 총을 맞고 물속을 거슬러 탈출 생존했다.[5] 그가 후에 법원에 사건을 고발해서 모함자들이 재판받고 사형, 무기 등 언도 받았다. 그후 한얼학교 이사회가 상철에게 학교 재건을 호소해왔다.

그런 인연으로 서울서 온 피난부대가 한얼에 집결됐다.

주태익[6], 김영규, 이상철[7], 김두식 등등이 진영읍 한얼학교에 모였다.


[각주]

  1. 강성갑 목사가 1946년 복음중등공민학교를 설립ㆍ운영하면서자신의 교육이념을 정립하고 이를 실천하고자 한얼중학교라는 정식학교를 설립했다(1948). 학교 명칭은 한얼로 정하고, 교육이념은 덴마크 그룬트비의 교육이념을 따라 하나님을 사랑하자, 이웃을 사랑하자, 흙을 사랑하자는 삼애정신으로 삼았다.
  2. 강성갑(姜成甲, 1912~1950) - 1930년 마산상업학교를 졸업하고, 1937년부터 1941년까지 서울연희전문학교를 수학하였다. 1943년 일본 동지사대할 신학과를 졸업하여 귀국 후 목사가 되었다. 부산대학교를 설립, 교수로 지내다가 농촌사회 개혁을 위해서 진영읍으로 옮겨서 1948년 한얼중학교(김해 최초의 중학교)를 설립하였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였을 때, 진영 지서장이 한얼중학교 학생들을 학도병으로 소집하려고 하였을 때 학도병 대상이 고등학생이라며 거부하였다. 이에 진영 지서장이 낙동강 수산교 아래에서 그를 사살하였다.
  3. 사동(使童) - 관청이나 회사, 학교, 영업처 등의 사무실에서 잔심부름을 하는 아이
  4. 도야(陶冶) - 훌륭한 사람이 되도록 몸과 마음을 다스려서 바르게 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도기를 만드는 일과 쇠를 주조하는 일
  5. 당시 한얼중학교 이사장이었던 최갑시는 이때 간신히 목숨을 구해 당시 강성갑의 마지막 기도를 다음과 같이 전했다. “주여, 이 죄인을 용서해 주시고 이 겨레를 가난과 재앙에서 건져주소서 한얼을 축복해 주소서. 이 죄인 주의 뜻을 받들어 당신의 품에 육신과 혼을 맡깁니다.”
  6. 주태익(朱泰益, 1918~1976) - 평남 대동 출신. 1940년 평양신학교 예과를 수료한 뒤, 1942년 백합보육원을 경영하였다. 1947흥국시보를 비롯하여 기독교잡지의 편집을 맡아보다가 1948년부터 희곡과 방송극 집필을 시작하였다. 1964년 방송작가협회 부회장, 1968년 크리스천문학가협회 회장, 1971년에는 방송윤리위원을 지냈다.
  7. 이상철(1924~2017) - 목사. 동양계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캐나다연합교회(The United Church of Canada) 회장을 역임. 1924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태어나 7살 때 부모를 따라 만주 용정으로 이주했다. 이후 캐나다 연합교회가 세운 은진중학교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시인 윤동주, 크리스찬아카데미 강원룡 목사, 통일운동가 문익환 목사, 오리 전택부 선생 등이 이 학교 출신이다. 이때 장인이 된 김재준 목사와 사제의 연을 맺은 것으로 알려졌다. 1947년 조선신학교(현 한신대학교)에서 공부한 뒤 1953년 한국기독교장로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61년 캐나다 밴쿠버 유니언신학교에서 공부하기 위해 캐나다로 이주했다. 1969년부터 1988년까지 캐나다 토론토한인연합교회 담임목사로 섬겼다. 캐나다연합교회 토론토연회에서 인권과 정의 구현을 위해 활발히 활동하던 이상철 목사는 1985년 연회장에 당선됐다. 1988년에는 임기가 2년인 캐나다연합교회 회장에 당선됐다. 캐나다연합교회는 이상철 목사가 재임하던 기간에 다양한 사회 이슈와 맞닥뜨렸다고 전했다. 캐나다연합교회는 이상철 목사가 재임하던 1988년 동성애자 목사 안수를 허용했다. 당시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이 목사는 교단 소속 교인들에게 "함께 살고, 함께 투쟁하고, 함께 성장하자"며 설득했다. 캐나다 이민 1세대였던 이상철 목사는 한국 민주화 운동을 위해서도 싸웠다. 한국 인권 상황과 북한 공산주의 인권 탄압을 비판했다. 남한 군부독재 시대에는 캐나다에서 조국을 위해 목소리를 높였다. 독재자들의 탄압을 피해 캐나다로 망명한 이들의 그늘이 됐다. 한국 정부는 그의 업적을 인정해 2007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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