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8일 월요일

[범용기 제2권] (46) 忙中閑(망중한) - 통영 앞바다 섬에서 하루

통영 앞바다 섬에서 하루

 

여름이었다. 한얼학교도 하기방학 동안이었다. 조향록, 주태익은 통영 앞바다 다도해를 누벼 거제도, 지신도[1]의 명승을 탐방할 계획으로 나를 동반했다.

속셈으로는 주태익의 실연(?) 고민을 발산시키기 위한 행각이었던 것 같다.

그 당시 이승만 박사는 3선 음모를 진행시키고 있었으며 부통령 선정에 갈팡질팡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교회적으로는 고려신학교 측과 그보다도 더 보수파라는 송상석[2] 목사 등이 W.C.C.를 용공단체로 몰고 W.C.C.에 동조하는 나와 한국신학과를 용공으로 규정하는 팜플렛을 써 냈었고 그것을 증빙서류로 하여 교회 교란, 국가반역 등 죄목으로 처단해 달라는 청원서를 어떤 국회의원을 통하여 국회에 제출한 일이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나를 위로하려는 호의도 겸한 것이었다고 짐작된다.

 

우리는 지신도[3]인가 하는 아름다운 섬 백사장에서 여름빛을 몸으로 먹으며 즐겼다. 파출소가 있었다. 그 문 앞에는 간판이 서 있다. “대통령 이승만, 부통령 이범석이라 쓰여 있었다. 돌아올 때에는 이름이 바뀌었다. “대통령 이승만, 부통령 함태영으로 됐다.

도민들은 이범석[4]이 누군지, 함태영이 누군지,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누군지도 모르면서 어떻게 투표하는 거요?”

투표가 무슨 투표예요! 파출소에서 다해 주는데!”

누가 무어되든, 우리게 무슨 상관입니꺼!”

 

우리가 거제도를 거쳐 부산에 돌아왔을 때 함태영은 부통령이었다.

 

이조말, 독립협회 사건으로 이승만 이상재[5] 등등이 감옥에서 사형을 기다리고 있을 때, 함태영은 평리원[6] 판사였다.

그는 민 씨 가문의 거의 절대적인 압력을 무시하고 아주 가벼운 형벌을 선고한 후 곧 석방했다.

이 박사는 그 은공을 갚는다는 의도에서 옹을 등용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함태영 부통령은 정치적 실권자가 아니었다.

이 박사 독재장식품이랄까.

그래도 그에게는 품위가 있었다.

 

강성갑의 한얼학교에도 자주 찾아와서 격려했다. 아무 통고없이 나타난다.

지방경찰에서는 허둥지둥 달려와 경호의 책임을 진다. 지방순경과 부통령! 그것은 하늘과 땅의 사이었달까 그들은 아찔하게 쳐다보는 것이었다. 부통령의 소탈한 방문 때문에 피난부대 교사진의 위치도 드높아진다. 그래서 지방경찰이나 관청이나 시민들이 감히 토백이텃세를 부리지 못하게도 했다.


[각주]

  1. 지심도 경상남도 일운명 지세포리에서 동쪽으로 1.5킬로미터 해상에 위치한 지심도는 면적이 0.338, 해안선 길이는 3.5의 작은 섬으로 장승포항에서 도선으로 약 15분 거리에 있다.
  2. 송상석(1896~1980) - 1931년 평양신학교에 입학, 1934년 졸업하였다(29). 고신측 형성과정에서 중요한 기여와 역할을 했던 인물로 한상동 목사와 쌍벽을 이루었다. 이후 한상동 목사와의 교권대립이 극에 달하였고, 1974년에 교단에서 면직되었다(34년만인 2008년에 사면되었다).
  3. 지심도를 가리킴
  4. 이범석(李範奭, 1900~1972) - 일제강점기 북로군정서 교관, 고려혁명군 기병대장, 광복군 참모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1910년 사립 장훈학교에 들어갔으며, 1913년 이천공립보통학교를 거쳐서 경기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1915년 여운형과 함께 중국으로 건너가 1916년 항저우체육학교에서 6개월간 수학하였으며, 원난강무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1919년 신흥무관학교 교관, 북로군정서 교관, 1920년 사관연성소 교수부장이 되었다. 같은 해 10월에는 청산리대첩에서 제2제대 지휘관으로 활약하였고, 1923년에는 김규식 등과 고려혁명군을 창설하여 기병대장을 맡았다. 1925년 소련혁명전에 참가하였으며 중국군에서도 활약하였다. 1940년 광복군 제2지대장으로 미국군과 함동작전에 참가하였고, 1945년에는 광복군의 참모장(중장)이 되었다. 1945818일에는 광복군 정진대의 일원으로 장준하, 노능서 등과 함께 서울 여의도 비행장에 도착했으나 일본군의 입국 거부로 다음날 중국으로 돌아간 일도 있었으며, 19466월 정식으로 환국하였다. 194610월 조선민족청년단을 결성하였으나 주위로부터 국수주의적 극우단체라는 비난을 받아 대한청년단으로 통합되었다. 1948년 초대 국무총리와 국방부장관을 겸임하였고, 1950년에는 주중국대사, 내무부장관을 역임하였다. 195112월 이승만의 지시로 자유당을 창당했으며 1952년 부통령에 입후보하였으나 낙선하였고, 1953년 이승만의 족청계 숙청으로 자유당에서 제명되었다. 1956년에는 무소속으로 부통령에 출마했으나 낙선하였고, 1960년 자유연맹을 바탕으로 참의원 의원에 당선되었다. 1963년에는 국민의 당결성에 참여하여 최고의원이 되었고, 19671월에는 윤보선, 유진오, 백낙준과 함께 4자회담을 성사시켜 통합야당 신민당 출범에 이바지하였다. 1972511일 심근경색으로 사망하였다.
  5. 이상재(李商在, 1851~1927) - 일제강점기 YMCA 전국연합회 회장, 신간회 창립회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정치가, 민권운동가, 청년운동가. 1867년 과거에 낙방한 후 세상을 등지고 살고자 하였으나 박정양의 집에서 개인 비서일을 보았다. 1881년 박정양의 추천으로 신사유람단 수행원으로 일본의 신흥문물을 접하고 돌아와 개화운동에 눈을 떴다. 1884년 갑신정변의 실패로 낙향하였다가, 다시 박정양의 추천으로 관직에 등용되었고, 독립협회의 활동에 동참하였다. 1910년 국권이 강탈된 이후 유신회의 공격으로 사멸직전인 청년회를 사수하였으며 조선기독교청년회전국연합회를 조직하여 한국YMCA운동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1927년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단일전선을 결성하고 신간회를 조직할 때. 창립회장으로 추대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였다.
  6. 평리원(平理院) - 18995월부터 190712월까지 존치되었던 최고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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