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8일 월요일

[범용기 제2권] (48) 忙中閑(망중한) - 상철ㆍ신자 결혼

상철ㆍ신자 결혼

 

신영희와 정자는 진영읍에서 보건진료소를 경영하고 있었기에 한얼학교 피난부대 교사들과는 한 식구처럼 지내는 것이었다. 그때 상철은 한얼학교 교사로 있었다.

하루는 정자가 일부러 부산에 와서 상철과 신자의 결혼을 허락하라고 나에게 간곡히 권한다.

그거야 자기들 의사에 달린 것이지, 다 큰 사람들에게 부모가 무슨 간섭이냐!” 하고 나는 말했다. 그것은 허락의 은어(隱語)[1].

상철과 신자는 같은 신학생으로 오랫동안 경동교회에서 주일학교 일을 함께 한 잘 아는 사이였다.

후에 들은 얘기지만 정자가 상철과 신자의 결혼 허락을 내게 권했을 때는 이미 상철과 신자는 어느 조용한 곳에 가서 둘이서 손잡고 기도하고 결혼을 약속했단다.

상철은 부산에 올라와 한신 학부대학원을 마치고 학사, 석사의 칭호를 받았다. 학우회장으로도 있었다.

 

결혼식으로는 부산 남부민동 한신강당에서 최윤관[2] 목사 주례로 거행했다.

청첩인으로는 강원용과 김하용이었다. 피로연은 즐거웠다. 졸업생과 재학생, 피난 중의 명사들, 시내 교직자들강당이 터질 지경이었다. 메마른 피난 생활이었지만 냉면은 넉넉했다.

신접살림을 위해서는 남부민동 골짜기 건너편 가파른 언덕 중턱에 맨드름이[3] 매달린 외호집을 세내 두었다.

 

신랑ㆍ신부는 피로연이 끝나자 우리 집에 들었다. 음식은 성의껏 차렸단다.

신랑은 식사 시간 전에 걷잡을 수 없이 운다. 뭔가 폭발되는 감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이유를 나는 모른다. 추측건대, 그는 시베리아에서 나서 어려서 부모를 따라 북간도에 와서 고생 고생하면서 자라왔다. 해방 후 부모형제들은 북간도에 남겨두고 단신으로 공부한다고 월남했다. 평생 혼자서 고학해온 의지파다. 그러나 결혼의 즐거운 날, 아버님도 어머님도, 할머니도 외갓집도 곁에 있지 않다. 혈연으로 본다면 철저한 외토리[4].

 

나는 왕유[5]의 시를 연상한다. 이 시는 왕유17세 때 지은 시다.

 

獨在異鄕爲異客, 每逢住節倍思親.

遙知兄第登高, 遍挿萸 小一人.

 

혼자 딴 고을 나그네 되니,

명절 때마다 부모 생각 더 난다네,

오늘 내 형님, 내 동생

산에라도 올라갔다면,

가슴에 다는 꽃

한 송이 남는달거야!” (사역)

 

집에서 예배드리고 둘이서 산비탈 오솔길을 오른다. 딸 시집보내는 부모는 언제나 시원ㆍ섭섭하다는데, 하나 더 붙여 애처롭기도 하다.

 

사흘 후에 신부가 부모님을 식사에 초대한다. 신접살림은 행복한 것 같았다.


[각주]

  1. 은어(隱語) - 특수한 집단이나 사회, 계층에서 남이 모르게 자기들끼리만 알도록 쓰는 말
  2. 최윤관(1899~1988) - 평북 철산 출생. 1917년 평북 선천 신성중학교를 졸업하고(신성중학교를 다니던 중 천남동교회 김창석 목사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이어서 평양 숭실전문학교에 입학하여 1921년에 졸업하였다. 졸업 후에 황해도 재령의 명신중학교의 영어교사로 시무하다가 1925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휴론(Huron) 대학에서 학사학위(BA)를 받았다. 1928년에 프린스턴대학 신학부에서 신학석사(B.D)를 획득하고, 1931년에 하트포트 대학원에서 신학석사학위(S.T.M.)를 받았다. 1933년 콜럼비아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하던 중 미국 교포 2세인 안노라 씨를 만나 결혼을 하고 박사과정을 마치지 못했다. 이후 고국의 윤산온 목사가 학장으로 있는 숭실대학교에서 교수가 필요하다는 편지를 받고 귀국하게 되었다. 귀국 후에 오산교회, 곽산교회, 세브란스 교목, 도화동교회를 섬기다가 공덕교회를 맡아서 이후 22년간 공덕교회를 섬기게 된다. 공덕교회를 섬기면서 1943년 조선신학교 강사로 시작해서 1945년 정식 교수로 취임하여 신학생을 가르쳤다(공덕교회에서는 설교만 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이 장관 자리를 제안했을 때 나는 목사로서 교회 강단을 지키고, 목사양성을 위해서 가르치는 일을 천직으로 안다며 거절했다고 한다. 1973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나성(Los Angeles)에서 지내다가 1988년 하나님 앞으로 갔다.
  3. 맨드름하다 - ‘반드레하다의 방언
  4. 외토리 - ‘외톨이’(의지할 데가 없고 매인 데가 없는 홀몸)의 비표준어
  5. 왕유(왕웨이, 王維, 699~759)는 중국 성당(盛唐)의 시인ㆍ화가로서 자는 마힐(摩詰)이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