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26일 금요일

[범용기 제3권] (2) 序章 : 1970년대 초기의 다양한 변화 - “제3일” 발간

3발간

 

19708, 3선개헌 약 1년 후에 나는 3이란 월간 잡지를 내기로 했다. 그 목적은 교회의 사회화와 국민의 민주화를 위한 계몽운동에 있었다. 어느 날 저녁이었던가 박형규[1], 현영학[2], 서광선[3], 이문영[4], 홍동근[5] 등이 중국요리집 대관원인가에 모였다.

잡지를 내자는 데는 모두 찬성이었다.

잡지 이름을 뭐라 할까 하여 이런 저런 제호들이 떠올랐었지만 평범하고 흔해빠진 감촉을 벗어나지 못했다. 결국 내가 내놓은 3이 채택되었다. 그러나 한글로 쓸 것, “자는 아라비아 숫자로 쓸 것이라는 조건부였다. 내가 한문 글자를 많이 섞는 데 대한 경고였다.

문공부에 등록을 해야 한다기에 박형규와 함께 문공부에 갔다.

서류가 제출되면 지체없이 등록을 진행시키겠다고 약속한다.

박형규는,

이건 내가 하는 게 아니고 김재준 목사님이 하는 겁니다. 나는 심부름으로 모시고 온 것뿐입니다하고 일부러 따지기도 했다. 아마도 자기가 한다면, “등록에 지장이 있을까봐 그러는 것 같았다.

며칠 후에 등록이 됐다는 통지가 왔기에 문공부에 들어가 등록증을 갖고 왔다. 목적은 성경연구와 전도(伝道)를 위한 교회잡지란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19709월에 창간호를 냈다.

3이란 제목의 창간호 권두언[6]은 이런 것이었다.

 

바로 그때에 어떤 바리새파 사람이 예수께 와서 말했다. ‘당신은 이곳을 떠나 계셔야 하겠습니다. 헤롯왕이 당신을 죽이려고 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는 그 여우에게 가서 이 말을 전하라. 보라,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칠 것이요 사흘째 되는 날에 나의 일을 완전히 이룰 것이다.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그 다음날도 나는 내 길을 가야 하겠다.’”(누가 13:31-33)

 

오늘도 내일도 나는 내 길을 간다!”

이것이 예수의 삶이었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가는 길대로 가지 않는다고 그를 잡았다. 그래서 첫날에 그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 다음 날에는 무덤 속에 가두고 인봉[7]했다. 그러나 인간들이 자기 악의 한계점에서 됐다!” 하고 개가[8]를 부를 때, 하나님은 아니다!” 하고 무덤을 헤친다. 예수에게는 이 3이 있었다. 그의 생명은 다시 살아 무덤을 헤치고 영원에 작열(灼熱)한다.

 

3” - 그것은 오늘의 역사에서 의인이 가진 특권 - 역사의 희망은 이 3에서 동튼다. 이 날이 없이 기독교는 없다. 이 날이 없이 새 역사도 없다. (長空)


[각주]

  1. 박형규(朴炯圭, 1923~2016) - 경남 창원시 마산 출생. 1950년 부산대학교 철학과를 중퇴하고 1950~58년 미 육군에서 근무했다. 그후 목사가 되기로 결심해 1959년 일본 도쿄(東京)신학대학원에서 학사 학위를 받고, 1963년 미국 유니언신학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1960년 한국기독교장로회 서울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은 이후 공덕교회와 초동교회에서 목회 사역했다. 1967년 한국기독학생회 총무를 지냈으며, 1968년 기독교서회 발행 <기독교사상> 주간, 1970년 기독교방송 상무이사를 지냈다. 1972년 서울제일교회 담임목사로 취임하여 19928월까지 20년간 시무했다. 1981년 한국기독교장로회 제66회 총회 총회장을 역임하였다. 그는 기독교의 사회참여를 실천하여 1973년 반유신체제 시위인 남산부활절사건’, 1974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사건’(민청학련사건)기독교장로회 청년 전주시위사건등에 연루되어 구속되는 등 평생 여섯 차례 옥고를 치렀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초대 이사장(2002~2005)과 남북평화재단 이사장(2007~2011)을 역임하였다.
  2. 현영학(玄永學, 1921~2001) - 함경남도 함흥 출생. 목사 현원국과 독립운동가 겸 교육자인 신애균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윤치호의 여섯째 딸 윤보희와 결혼했다. 1938년 함흥 영생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간사이학원 신학부에 입학하였다. 광복 이후에 이화여전 강사, 교수로 재직하다가 1947년 미국 유학 성서신학교에서 공부하였고, 1949년 유니언신학교에서 니버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1955년 이화여대 신학과 교수로 복귀하였고, 박정희 군정 연장에도 반대하였다. 1970년대에는 서남동, 안병무와 함께 민중신학 운동을 주관하였다.
  3. 서광선(徐洸善) - 1931년 평안북도 강계 출생. 한국전쟁 당시에 아버지 서용문 목사는 공산군에게 총살을 당하였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부산으로 간 그는 해군에 입대하였다(당시 사귄 친구 중에 민경배 교수가 있다). 그곳에서 미국 유학의 기회를 얻어 몬타나 주의 로키마운틴 대학과 일리노이 주립대학원에서 공부를 하였다. 함선영 사모와의 만남 이후에 신학을 공부하기로 마음먹고 유니온신학교에서 공부하고 귀국하여 이화여대 교단에 서게 되었으며, 유니온신학교에서 사귄 박형규 목사를 통해서 김재준 목사를 만나게 되고 <3>이란 동인지에 관여하게 되었다. 1980년 군사정권에 의해 해직교수가 되면서 장로회신학대학에서 학과목을 이수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4. 이문영(李文永, 1927~2014) - 호는 소정(小丁). 서울 출생. 1970-80년대 민주화운동과정에서 31 민주구국선언, YH사건과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고려대 교수직을 세 번 해직당했으며 모두 46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2008년 자서전에서, ‘유진오 총장에 대한 평가에서 일제 학병 출정을 독려한 친일파보다 전두환의 국정을 자문한 사람이기에 더 나쁘다고 회고했다.
  5. 홍동근(1926~2001) - 평양 출생. 한국전쟁 중 월남하였고 북의 평양신학교, 남의 장로회신학교를 거쳐 미국의 뉴욕신학교와 풀러신학교에서 공부하였다. 서울 영락교회와 동신교회에서 부교역자로 목회하다가 일본 경로한인교회를 섬기다가 미국으로 건너갔다. 1970년대 미국으로 이민하여 목회활동을 하다가 1970년대 말부터 북한을 왕래하면 통일운동을 벌였고, 1989년부터 미국과 평양을 오가며 김일성대학에서 기독교를 가르쳤다. 김일성종합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6. 권두언 , 논문 등의 첫머리에 그 취지나 내용의 대강을 간략하게 적은 글
  7. 인봉(印封) - 봉한 자리에 도장을 찍음. 또는 그렇게 찍힌 도장. 유의어로 봉인’(封印)이 있다.
  8. 개가(凱歌) - 큰 승리나 성과, 싸움에 이기고 돌아오는 것을 축하하는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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