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26일 금요일

[범용기 제3권] (3) 序章 : 1970년대 초기의 다양한 변화 - “제3일” 간행 후원회

3간행 후원회

 

함석헌[1][2]은 나보다 3개월인가 먼저 씨ᄋᆞᆯ의 소리[3]란 월간지를 내고 있었다. 그이도 나와 별다를 것 없는 청빈한사(淸貧寒士). 그러나 그에게는 동향(同鄕) 후배인 장준하[4], 계훈제[5] 등 민완(敏腕)[6]의 젊은 동지들이 있어서 기금 2백만원을 세우고 책이 나오는대로 젊은이들이 동원되어 몇 백부씩 갖고 거리에서 마치 제7일안식일[7]교인들이 시조”(時兆)[8] 잡지 팔 듯이 권매(勸買)[9]해서 다음호 출판비를 너끈히 대인다고 했다.

내게도 신념은 있었다.

이 격동하는 한국 역사의 싯점[10]에서 작고 고요한 하느님의 소리가 주어진다. 출판비가 문제겠느냐 하는 믿음의 밑천은 내게도 있었고 내 동지들에게도 있었다는 말이다.

사실 무일푼으로 어떻게 3을 월간으로 내겠느냐고 묻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물을 만도 한 일이고 대답할 만도 한 간증꺼리라 하겠다.

한신13회 출신으로, 갑산(甲山)[11] 출생 이주식’(李周植)[12]이란 다부진 사람이 있었다. 같은 함남 출신인 조향록[13] 목사와 비슷한 타입의 인물이라고 판정된다. 그는 내가 눈여겨 보고 있는 후배들 중의 하나다.

물정에 빠른 전성천[14] 박사가 언젠가 한국의 뻐스 씨스템은 세계제일이라고 말하던 것이 기억나지만, 이주식은 뻐스회사를 창립하고 버스 40여대를 운영하는 의젓한 사장(社長)이었다.

그리고 같은 한신졸업생인 노신영[15] 장로는 그 회사 부사장격이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그 회사에서는 의무적인 교양강좌를 설치하고 십대 소녀들인 버스차장들을 여학교 기숙사 형식의 합숙소에 수용한다고 한다. 그리고 거기서 바른말, 고운말 가르치기, 중고등학교 과목 중에서 몇 과목 강의, 소녀기의 건강관리, ‘예의도덕등등을 가르친다.

그래서 그 회사 버스는 청결과 친절로 유명해졌다는 것이다. 일반세평(世評)[16]도 그러했다.

하루는 윤반웅[17], 전학석[18], 노신영[19] 등 한신 출신들이 수유리 내 방에 모여왔다.

우리도 3을 후원합시다.”

동인들은 글을 쓰고 우리는 출판비를 마련합시다. 함석헌 영감도 하는데 천명 가까운 제자를 두신 김 목사님이 못한대서야 말이 됩니까!”

윤반웅 목사가 자신있게 말했다.

윤반웅, 전학석, 문익환, 문동환(이 둘은 동인(同人)이기도 하다), 노신영 등이 하루는 내 방에 모여 와서 후원회를 발족시켰다.

규약이란 것은 그야말로 약법 3’(約法 三章)이어서 몇 줄 안 된다.

일만 원 낸 사람을 회원으로 하고, 5만원 이상 낸 사람을 특별회원으로 한다는 것이다.

최태섭[20] 장로가 5만원을 냈다. 손순조[21] 목사는 매년 일만 원씩 보내왔다.

후원회장으로는 문익환 목사, 서기 겸 회계로는 이우정[22] 선생이 선출됐다.

내가 19743월에 캐나다로 이주할 때에 후원회 적금은 100만원 선에 이르렀다.


[각주]

  1. 함석헌(咸錫憲, 1901~1989) - 평안북도 용천 출신. 당숙 일형(一亨)이 세운 삼천재(三遷齋)에서 한학을 수학하다가 1914년 덕일학교(德一學校)를 졸업하였다. 1916년 양시공립보통학교(楊市公立普通學校)를 졸업하고, 그 해 평양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였다. 그러나 1919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가담, 학업을 중단하였다가 1921년 정주(定州)의 오산학교(五山學校)에 입학하였다. 그 때 안창호(安昌浩)ㆍ이승훈(李昇薰)ㆍ조만식(曺晩植)으로부터 민족주의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1923년 오산학교를 졸업한 뒤에 일본으로 건너가 1924년 동경고등사범학교 문과 1부에 입학, 1928년 졸업하였다. 이 시기에 일본인 무교회주의자 우치무라(內村鑑三)의 성서연구에 깊이 영향을 받고 김교신(金敎臣)ㆍ송두용(宋斗用)ㆍ정상훈(鄭相勳) 등과 함께 무교회주의 신앙클럽을 결성하였다. 1927년 동인지 성서조선 聖書朝鮮창간에 참여하여 글을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19284월 귀국하여 모교인 오산학교의 교사로 부임하였다가 19383월 사임하였다. 1940년 송산(松山)에서 김혁(金赫)이 운영하는 송산학원을 경영하다가 계우회사건(鷄友會事件)에 연루되어 대동경찰서에서 1년간 구류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1942성서조선필화사건에 연루되어 다시 1년간을 서대문경찰서에서 미결수로 복역하였다. 19473월 월남하여 YMCA에서 성서강해를 계속하였다. 1956년부터 사상계에 자신의 글을 발표하면서 정치적ㆍ사회적 문제들을 기탄없이 비판하였고, 1958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면서 자유당 정권에 도전하였다. 1961516군사정변 직후에는 ‘516을 어떻게 볼까로 군사혁명 정권에 도전하였다. 1962년 미국무성 초청으로 방미하였을 때 퀘이커교(Quaker)와의 친밀관계를 굳혔다. 1967년 장준하(張俊河)의 국회의원 옥중출마를 지원하기도 하였다. 19704씨ᄋᆞᆯ의 소리를 창간하였고, 민중운동을 전개하면서 반독재민주화운동에 힘을 기울였다. 주요저서로는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1948)인간혁명(1961)역사와 민족(1964)뜻으로 본 한국역사(1967)통일의 길(1984) 등이 있다.
  2. () - 남자 노인을 높여 가리키는 말
  3. 씨ᄋᆞᆯ의 소리- 함석헌이 19704월에 민주주의 발전에 이바지하기 위하여 발행한 잡지. 창간호와 5월호를 낸 뒤 문화공보부로부터 등록취소처분을 받았으나, 대법원의 승소판결을 받아 19719월호부터 복간하였다. 불가피한 경우를 빼고는 모두 구어체 표현을 썼고, 일반 민중들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노력한 것도 특기할만하였다. 창간사에서 신문이 씨ᄋᆞᆯ에게 씨ᄋᆞᆯ이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가리고 보여주지 않을 뿐 아니라, 씨ᄋᆞᆯ이 하고 싶어 못 견디는 말을 입을 막고 못하게 한다고 주장하였다. 발행목적은 첫째 바른 말을 하자, 한 사람이 죽는 일이 있더라도 옳은 말을 하자, 둘째 유기적인 공동체를 기르는 일을 하자는 것이었다. 19807월 정기간행물정비 때 등록 취소되었다가, 19892월 복간하였다.
  4. 장준하(張俊河, 1918~1975) - 평북 삭주 출생. 아버지는 장로교 목사인 장석인이다. 일본 도요(東洋)대학 예과를 고쳐 도쿄의 니혼신학교에서 수학하던 중 1944년 일본군 학도병에 강제 징집되었다. 중국 쓰저우 지구에 배속되었으나 6개월만에 탈출에 성공하여 김준엽의 도움으로 한국광복군간부훈련반에 입대하였다. 이곳에서 훈련을 받으면서 잡지 등불을 발간했다. 1945년 충칭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하였다. 이범석 휘하에 배속되었고, 미국 전략정보국이 주관하는 한미합작특별군사훈련을 받았다. 광복이 되자 김구의 비서로 조국에 돌아왔다. 이후 학업을 마치기 위해 한국신학대학에서 수학하였고, 한국전쟁 말기인 1953사상계를 창간하였다. 516 군사정변 이후 들어선 박정희 정부에 대해 적극적으로 비판하였으며, 1975년 개헌청원백만인서명운동본부의 이름으로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발표했다. 1975817일 경기도 포천군에 있는 약사봉에서 등산하다가 의문의 사고로 사망하였다. 2012년 묘지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두개골 함몰 흔적이 발견되어 언론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았다. 1962년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막사이사이상(언론부문상)을 수상했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 1999년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5. 계훈제(桂勳梯, 1921~1999) - 본관은 수안(遂安). 평안북도 선천 출신. 계봉집(桂鳳集)과 어머니 이형저(李亨姐)5남매 중에 막내로 출생하였다. 선천 신성(神聖)학교를 졸업한 뒤, 1943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에 입학하여, 1948년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재학중에 학병징집을 거부하다 강제징용을 당해 노역하던 중, 비밀리에 민족해방협동당에 입당하여 독립운동을 벌인 것을 시발로 하여 평생을 자유와 평등의 실천가로 살았다. 해방후 서울대학교 문리대 학생회장으로 백범 김구의 민족주의 노선에 서서 반탁운동, 남북협상지지 등 우익학생운동을 주도하였다. 419혁명 후 한국교원노동조합 총연합회 서울지구 중앙위원으로서 교원노조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516 군사정변 후 군사독재와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투쟁을 전개하였고, 함석헌ㆍ장준하와 함께 자유언론수호협회를 결성하여 언론의 자유를 위해 투쟁하였다. 1970년 함석헌이 씨ᄋᆞᆯ의 소리를 창간하는데 참여하여 1979년 폐간될 때까지 편집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69년 박정희 정권에 대항하여 3선개헌반대투쟁위원회 상임운영위원을 역임하였고, 1970년 박정희 정권이 종신집권을 기도할 때 함석헌ㆍ이병린ㆍ천관우 등과 함께 주도한 민족수호협의회 운영위원직을 맡아 민주화운동을 벌였다. 1979년 윤보선ㆍ함석헌ㆍ김대중이 공동의장을 맡았던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의 운영위원으로 일했다. 1982년 이른바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으로 2년 여의 피신과정 후 체포되어 구속되었다. 1987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의 상임공동대표를 맡아 19876월 민주항쟁을 선도하였다.
  6. 민완(敏腕) - 재빠른 팔이란 뜻으로, 일을 재치 있고 빠르게 처리하는 솜씨를 이르는 말
  7.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1863년 미국 미시간주의 배틀 크릭(Battle Creek)에서 공식적으로 창립된 신종교. 교단의 기원은 열렬한 성경연구가이며 침례교인이었던 밀러(Miller, W.)의 예언에 뿌리를 두고 있다. 밀러는 다니엘을 연구하여 예수의 재림이 1848321일부터 1844321일 사이에 이루어질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뒤에 18441022일로 종말시기가 변경되었으나, 그 날이 되어도 예수가 재림하지 않자 많은 신도들이 실망한 가운데 에드손(Edson, H.)은 밀러의 예언을 재해석하여 예수재림에 대한 신념을 굳건히 하였다. 베이츠(Bates, J.)는 제7일인 토요일이 진정한 안식일임을 주장하면서 제7일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 자녀들만이 가지는 하나님의 인(이라고 가르쳤다. 1966년 첫 의료기관인 배틀크릭요양원이 설립되었고, 세속의 나쁜 영향력에서 젊은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교육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어 1974년 첫 단과대학인 배틀크릭대학이 세워졌다. 이후 활발한 해외선교가 이루어지고 있다. 1903년 교단본부를 워싱턴으로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일본인 전도사 구니야(國谷秀)로부터 침례를 받은 손흥조(孫興祚)가 최초의 재림교도이다. 일제 강점기에 교회 기관지 교회지남과 선교잡지인 시조(時兆)가 폐간되었고 194312월에는 교회가 해산되기에 이르렀다. 광복 후 재건작업을 거쳐 1947년에 시조가 복간되었으며 1971년에는 김이열(金以悅) 목사가 연합회장으로 취임하여 한국인이 교단책임을 인수하게 되었다.
  8. 시조(時兆- 1910년에 창간되었으며, 발행인은 유형환, 편집인은 천세원이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에서 세텬ᄉᆞ의 긔별이라는 이름으로 191010월에 창간된 회지로서, 19167월호부터 제호를 시조월보(時兆月報로 바꿔 간행하였다. 시조라는 제호는 19239월포부터 붙여졌는데, 이는 통권 제156호 때의 일이다. 당시 읽을 거이 없던 일반인들에게 파고 들어가 보급되었다. 일제에 의해 1944년 강제 폐간되었다가 광복 이후 복간(1947), 한국전쟁으로 휴간되었다가 서울의 수복과 더불어 195110월에 복간되었다.
  9. 권매(勸買) - 물건 따위를 사기를 권함
  10. 싯점 - ‘시점(시간의 흐름 위의 어느 한 순간)의 비표준어
  11. 갑산(甲山) - 함경남도 북동쪽에 있는 군. 개마고원의 일부를 이루며, 희색봉, 백모산, 활기산, 원봉 따위의 높은 산들이 많다. 명승고적으로는 동인보(同仁堡), 여진성(女眞城) 따위가 있다.
  12. 195312월에 한신대학교를 졸업하고 발음교회를 개척하였다.
  13. 조향록(趙香祿, 1920~2010) - 함경남도 북청군 출신으로 일제강점기 말기인 1943년에 조선신학교를 졸업하고 장로교 목회자가 되었다. 풍상읍교회 전도사(1943), 신사동교회 목사(1946), 한얼중고등학교 교장(1951)을 거쳐 195433세의 젊은 나이에 서울 종로구의 초동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24년간 섬겼다. 1971년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장, 1976년 한국신학대학장을 역임하였다.
  14. 전성천(全聖天, 1913~2007) - 일제강점기의 목회자, 신학자, 언론인, 정치가. 호는 하은(霞隱). 경북 예천 출신으로 일본 아오야마(靑山) 신학부를 졸업(1940), 미국 프린스턴에서 석사(1951), 예일대학에서 석사 및 박사학위를 받았다(1955). 이승만 정부에서 공보실장 및 정부대변인을 지내기도 했으며, 기독교방송 사장(1975~1978)을 지냈다. 1940년 조선신학원 교수가 되고, 남대문교회 전도사로 1942년까지 시무했다. 1942년 목사 안수를 받은 뒤, 남대문교회, 가리봉교회, 공덕동교회, 지평교회(예장 통합), 성남교회(예장 통합)를 시무하였으며, 1991년 진부령교회를 창립하기도 하였다.
  15. 장공은 노신영이라고 기록하였는데, ‘노준영이다. 그는 한국전쟁 당시에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지며 하나님을 경험하였다고 한다. 후에 군목이자 을지로교회를 창립한 이두수 목사가 자네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셔서 쓰시려고 하시는 거야라고 하였고, 부산 거제에 정양원이라는 수용소에 있을 때 한국신학대학을 다녔다. 1952년에 입학해 1956년에 졸업하였다. 졸업후에 지인인 이주식 목사가 산업선교를 권하여 196971일 화곡교통 주식회사라는 버스회사를 세웠다.
  16. 세평(世評) - 어떤 인물이나 일에 대하여 세상에 떠돌아다니는 평판
  17. 윤반웅(尹攀熊, 1910~1990) - 함경남도 신창군의 유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김재준의 영향으로 장준하와 함께 신학을 공부하게 되었고 장로교 목사가 되었다. 함경북도 웅기군에서 목회를 하다가 한국전쟁 때 월남하였다. 초기에는 여러 지역 돌면서 피난민을 상대로 목회를 하였으며, 현재의 동녘교회인 신흥교회에 재직하면서 유신체제에 대한 항거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1974년의 민주회복국민선언과 1976년 명동구국선언에 참여하였고(당시 구속자 가운데 최고령), 1975년에는 정치범 석방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가 구속되기도 하였다. 명동구국선언관련 법정에서 발언 가운데 박정희 씨라는 표현은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이었다고 한다. 5공화국에서도 집권 신군부 세력에 대한 반대 운동을 계속했다.
  18. 1948년 조선신학교 졸업, 천호동교회를 섬겼다.
  19. 노신영이 아니라 노준영
  20. 최태섭(崔泰涉, 1910~1998) - 1910년 평북정주에서 태어나 오산고보를 수료하고 월남한 뒤 57'유리가 전후 복구를 위한 경제재건에 꼭 필요한 물품' 이라는 생각에 동향출신인 이봉수 (李奉守) 한국유리 현회장 등과 공동으로 유엔한국부흥기구(UNKRA) 로부터 유리공장을 불하받아 한국유리공업을 설립했다. 회장은 이후 유리 한 업종만 파면서 이 회사를 세계 10대 유리전문회사로 성장시키고 국내 유리산업을 기간산업으로 발전시켰으며 96년에는 6개 관련 계열사를 거느린 한글라스 그룹을 출범시켰다.
  21. 장공 김재준 목사의 며느리 손행강의 부친. 서울연합감리교회 홈페이지에 보면, 손순조 목사가 19781월에 담임목사로 취임했으며, 1981531일 퇴임예배를 하였다고 나온다.
  22. 이우정(李愚貞, 1923~2002) - 조선 16대 인조의 셋째아들 인평대군의 후손. 1940년 경기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46년 조선신학원에 입학하였다. 1951년 한신대학교 신학과를 졸업하고 캐나다로 유학하여 토론토 대학교 내 임마누엘 칼리지에서 신학을 공부한 후 1953년 귀국고 동시에 한신대 교수로 부임하였다. 이후 여성운동가, 기독교 페미니스트, 인권운동가로 활약하였다. 1970년 한신대 학원민주화운동에 가담했다가 해직되었고, 1980년대 후반부터는 통일운동에도 참여하였다. 박정희 정권 시절에 ‘31 민주구국선언문을 직접 낭독하기도 하였다. 1992년 대한민국 제14대 민주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장공김재준목사기념사업회 초대 이사장(2002)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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