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24일 수요일

[낙수] 學窓餘祿(학창여록) - 信仰生活(신앙생활)의 調和(조화)

信仰生活(신앙생활)調和(조화)

 

십자군1권 제1, 1937. 5.
장공김재준저작전집(5)한국신학대학출판부, 1971, 2, 19~21.
김재준전집(18)한신대학출판부, 1992, 1, 138~142.


混沌(혼돈)宇宙(우주)를 품어서 거기서 빛이 생기며 거기서 秩序(질서)가 생기고 法則(법칙)이 서게 하신 하나님께서는 混沌(혼돈)보다도 秩序(질서)()하시며 極端(극단)보다도 調和(조화)()하신다. 하나님의 뜻을 사람이 거스리지 않고 사람의 뜻이 하나님께 ()여움이 되지않으며 사람의 뜻이 自然界(자연계)暢達(창달)[1]되고 自然(자연)이 사람에게 順服(순복)하는 世界(세계),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며 草木禽獸(초목금수)가 사람에게 順服(순복)하고 사람이 草木禽獸(초목금수)愛撫(애무)[2]하던 時節(시절)을 가르처 우리가 樂園生活(낙원생활)이라 말하지 않는가? 이것이 곧 大調和(대조화)生活(생활)이다. 調和(조화)所謂(소위) 中立(중립)이 아니며 妥協(타협)도 아니다. 調和(조화)는 사랑의 大團圓(대단원)이다. 中立(중립)利己的(이기적), 自己中心的(자기중심적)이 될 수도 있으며 妥協(타협)不義(불의)에 대한 屈服(굴복)이 될 수도 있으나 調和(조화)事爲(사위)全的(전적)으로 보아 各異(각이)部門(부문)活動(활동)主張(주장)尊重(존중)하면서도 同時(동시)에 한 共同目的(공동목적)發見(발견)하게하며 그 共同目的(공동목적)中心(중심)으로 하여 서로 ()하게 하는 ()()活動(활동)이다. 나는 우리의 信仰生活(신앙생활)이 너무 極端(극단)으로 치우치지 않고 좀 더 調和(조화) 圓熟(원숙)한 열매를 맺치기를 ()하여 企願(기원)하는 바이다.

 

우리의 信仰生活(신앙생활)에는 세 가지 要素(요소)가 있다. 그 첫째는 敎理(교리), 둘째는 神秘的(신비적) 靈交(영교), 셋째는 社會的(사회적) 實生活(실생활)이다. 이 세 가지는 恒常(항상) 있어야 할 것임과 同時(동시)에 또한 서로 調和(조화)되어야 할 것이다. 이 세 가지 () 어느 한가지만을 너무 極端(극단)으로 高調(고조)하는 때에는 우리의 信仰生活(신앙생활)變態(변태)가 생기는 것이며 따라서 惡魔(악마)에게 틈탈 機會(기회)()하는 것이다.

 

爲先(위선) 敎理(교리)() 方面(방면)을 생각하자. 敎理(교리)는 사람의 몸에 ()한다면 骨格(골격)과 같은 것이다. 이것이 없으면 우리의 信仰生活(신앙생활)은 마치 無骨虫(무골충)과 같아서 刺戟(자극)받는 대로 이리저리 蠢動(준동)하다가 그대로 짓밟혀 버릴 것이다. 우리의 信仰(신앙)에는 靈的(영적) 滿足(만족)을 줄 만한 系統(계통)있고 組織化(조직화)理論(이론)必要(필요)하다. 그러나 基督敎(기독교)敎理(교리)()코 어떤 머리 좋은 學者(학자)自己(자기)의 생각대로 案頭(안두)[3]에서 推理(추리)하여 얻은 結論(결론)은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啓示(계시)하신 眞理(진리)를 사람이 받아 그 받은 것을 整頓(정돈)하고 組織化(조직화)한 것이며 그리하므로 말미암아 無識(무식)()나 믿음 ()()聖經理致(성경이치)를 억지로 풀다가 스사로 滅亡(멸망)에 빠지는(벧후 3:16)[4] 것을 ()하게 하려 함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直接(직접) 啓示(계시)한 것이니만치 어느 環境(환경)局限(국한)될 것이 아니오 萬國(만국) 萬民(만민)에게 언제나 適用(적용)絶對(절대)()가 되는 것이니 이는 하나님께서는 信實(신실)하시고 永遠(영원)하신 ()이신 까닭이다. 그의 말슴에는 오직 -이 있을 뿐이다. (고후 1:19)[5]

敎理(교리)가 우리의 信仰生活(신앙생활), 骨格(골격)이 되느니만치 ()重要(중요)한 것이지마는 그렇다고 敎理(교리)만으로 信仰生活(신앙생활)營爲(영위)되는 것은 아니다. 敎理(교리)만을 너무 極端(극단)으로 高調(고조)하는 宗敎(종교)는 마치 病院(병원) 實驗室(실험실)에 세워놓은 白骨(백골)을 보는 것과 같은 無氣味(무기미)한 느낌을 준다. 메첸 博士(박사)有名(유명)著書(저서) 信仰(신앙)이란 무엇인가?하는 ()基督敎(기독교)敎理(교리)를 밝힌 ()에 있어서 莫大(막대)貢獻(공헌)이라 볼 수 있으나 信仰(신앙)을 밝힌 ()에 있어서는 部分的(부분적) 價値(가치)밖에 없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基督敎(기독교) 敎理(교리)啓示(계시)받은 것을 整頓(정돈)하는 데에 適合(적합)한 것이라고 하겠지마는 그렇다고 一律的(일률적)으로 機械的(기계적)으로 萬人(만인)이 다 똑같은 信條(신조)를 가질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은 같은 啓示(계시)()해서도 그 解釋(해석)이 같지 않으며 그 價値判斷(가치판단)不一(불이)한 까닭이다. 그런 까닭에 이 敎理問題(교리문제)累千年(누천년) 敎會內(교회내) 分爭(분쟁)()이 되어 온 것이며 지금도 그러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敎理問題(교리문제)에 있어서 調和(조화)齎來(재래)[6]려면 結局(결국) 가장 重要(중요)敎理(교리), 가장 中樞(중추)되는 信條(신조), () 使徒信經(사도신경)要理問答(중요문답) (웨스트민스터 告白書(고백서)) ()을 그대로 信奉(신봉)하는 ()其外(기외)聖經解釋(성경해석) ()에는 各其(각기) 自由(자유)()하고 彼此(피차) 그 때문에 敎勸(교권)發動(발동)시키는 等事(등사)[7]가 없도록 하는 것이 最善(최선)調和(조화) 方策(방책)인가 한다.

 

나는 以上(이상)에서 敎理(교리)만의 宗敎(종교)白骨(백골)과 같다고 말하였다. 그러면 이 白骨(백골)우에 살이 붙고 피가 돌아서 生氣(생기)를 띠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곧 神秘的(신비적) 靈交(영교). 우리는 깊은 祈禱(기도)瞑想(명상)으로 直接(직접) 하나님과 交通(교통)하는 가운데서 남못보는 世界(세계)를 보고 또 느끼는 것이다. 이것이 곧 體驗(체험)임과 同時(동시)信仰生活(신앙생활)生命(생명)이다. 敎理(교리)를 말하는 ()들은 神秘主義(신비주의)라고 하면 덮어 놓고 無價値(무가치)한 꿈과 같이 역이며 혹은 迷惑(미혹)이래서 무서워한다. 그러나 우리는 神祕(신비)靈感(영감)가진 信者(신자)를 높여야 하겠다. 이것은 말로 說明(설명)할 수 없으나 生命(생명) 自體(자체)와의 接觸(접촉)意味(의미)하는 것인 까닭이다. 그렇지만 이것도 極端(극단)에 흘러 거저[8] 꿈꾸기만 일삼는다면 그것은 큰 弊害(폐해)를 끼칠 것이다. 神祕(신비)한 가운데 恍惚狀態(황홀상태)에서 異像(이상)을 보는 ()는 잘못하면 純然(순연)主觀的(주관적) 自己浸淪(자기침륜)에 빠저서 理智(이지)感情(감정)批判(비판)能力(능력)을 잃고 다만 感情(감정)만이 그의 信仰(신앙)支配(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는 自己(자기)의 보고 느낀 世界(세계)絶對完全(절대완전)한 것이오 그와 달른 것은 다 거짓이라고 부르짖게 되는 것이며 따라서 그는 自己(자기)神秘的(신비적) 體驗(체험)에만 맛지 앓는 것이면 敎會(교회)權威(권위)一般信者(일반신자)忠告(충고)容納(용납)하지 앓을 뿐 아니라 聖經自體(성경자체)權威(권위)까지도 否認(부인)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極端(극단)神秘主義(신비주의)信仰(신앙)無政府狀態(무정부상태)齎來(재래)하는 것이며 따라서 結局(결국)虛無(허무)에 빠지고 말 것이다.

 

그러면 이 神祕(신비)靈驗(영험)豐富(풍부)한 이가 健全(건전) 調和(조화)信仰(신앙)保持(보지)[9]方途(방도)는 무엇인가? 1) 이런 神祕(신비)靈驗(영험)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 個人(개인)에게만 준 恩惠(은혜)인 줄 알고 스사로[10] 간직하여 오직 ()와 함께 기뻐할 것이오 ()一般(일반)에게 자랑하거나 宣傳(선전)하지 말 것이며 2) 敎會(교회)權威(권위)聖經(성경)權威(권위)絶對(절대) 順服(순복)하여 自己(자기)의 본 世界(세계)敎會(교회)制度(제도)聖經(성경)敎訓(교훈)相違(상위)[11]되는 것을 發見(발견)한 때에는 自己(자기)經驗(경험)을 버리고 聖經(성경)에 따를 것이다. 그러나 體驗(체험)이란 것은 제마음대로 버리기는 ()히 어려운 것이니까 아주 버리지 못할지라도 적어도 自己(자기)體驗(체험)敎會(교회)聖經(성경)敎訓(교훈) 以上(이상)이라고 宣布(선포)하는 데에는 이르지 말 것이다.

 

以上(이상)敎理(교리)靈驗(영험) 重要性(중요성)과 그 調和(조화)方途(방도)를 말하였거니와 이것만으로는 信仰生活(신앙생활)圓熟(원숙)()할 수 없다. 사람에게 骨格(골격)이 서고 血肉(혈육)이 움즉이여 산 사람이 되었다 할지라도 그 사람이 가증스럽고 게을러서 도모지[12] 일하는 것이 없다면 무슨 意味(의미)가 있겠는가? 그와 같이 우리의 信仰(신앙)健全(건전)敎理(교리)神祕(신비)靈驗(영험)이 있음과 同時(동시)에 이것이 實生活(실생활)에 나타나지 않으면 結局(결국) 열매 없는 나무 일앓하는 製糞機(제분기)와 같이 無益(무익)한 것이 될 것이다. 그러면 信者(신자)實際生活(실제생활)이란 무엇인가? 福音宣傳(복음선전)()實行(실행)이 두 가지로 要約(요약)할 수 있다. 生活(생활)은 그대로 基督敎(기독교)社會的(사회적) 進出(진출)意味(의미)하는 것이다. 어떤 이는 基督敎(기독교)社會的(사회적) 福音(복음)이라는 主張(주장)理論(이론)을 싫여하는 나머지 敎會(교회)社會事業(사회사업) 全體(전체)輕視(경시)하는 ()가 많다. 勿論(물론) 우리 힘으로 이 世上(세상)天國化(천국화)할 수 있다는 信念(신념)妄計(망계)라 앓할수 없으나 그 理論(이론)은 하여간 實際(실제)에 있어서 우리가 眞正(진정)으로 福音(복음)萬人(만인)에게 滲透(삼투)시키려면 또는 우리가 사랑을 實行(실행)하려면 이 社會(사회)萬般事爲(만반사위)直接關係(직접관계)하여 그것을 基督敎的(기독교적) 理想(이상)에 가까운 機關(기관)으로 ()하려는 運動(운동)을 일으키지 앓을 수 없는 것이다. 가난한 () ()()를 사랑하려면 自然(자연) 그들을 救濟(구제)社會的(사회적) 施設(시설)()하는 것이며 各樣(각양) 職業(직업)從事(종사)하는 사람에게 福音(복음)()하려면 그이들의 日常生活(일상생활)直接關係(직접관계)되는 事業關係(사업관계)提供(제공)하지 앓고는 될 수 없을 것이 아닌가?

그러나 基督敎(기독교) 社會事業(사회사업)從事(종사)하는 이들은 그 環境(환경)이 너무나 物質的(물질적)으로 悲慘(비참)하니만치 그 사람들의 物質的(물질적) 生活(생활)을 좀더 改善(개선)하려는 데에만 汲汲(급급)하여 社會制度(사회제도)改革(개혁)만을 생각하고 祈禱(기도)도 군소리다 敎理(교리)抽象的(추상적) 遊戱(유희)[13]. 다만 빵 問題(문제)解決(해결)()實際的(실제적) 勞力(노력)時急(시급)할 것뿐이다 하고 웨치는 일이 많다.

이것이 勿論(물론) 極端(극단)主張(주장)이다. 그러므로 基督敎(기독교) 社會事業(사회사업)從事(종사)하는 이들은 實際運動(실제운동)이 그 本務(본무)니만치 敎理的(교리적)으로 무슨 獨立(독립)理論(이론)體系(체계)를 세우려는 徒勞(도로)[14]()하고 一般(일반)信俸(신봉)하는 敎理(교리)尊重(존중)할 것이며 그 事業(사업)計劃(계획)努力(노력)()하는 것인만치 그것을 ()님의 뜻대로 運轉(운전)할 수 있는 靈力(영력), 사랑의 偉大(위대)心情(심정)培養(배양)하기 위하여 더욱 祈禱(기도)할 것이다.

 

나는 지금 朝鮮(조선) 敎會(교회)平和(평화)團結(단결)()하여 우선 理想的(이상적)으로 이 調和(조화)信仰生活(신앙생활)置重(치중)하기를 祈願(기원)하며 彼此(피차) 尊敬(존경)理解(이해)()안에서 한 兄弟(형제)誼分(의분)[15] 宣揚(선양)하여지이다고 비는 바입니다.


[각주]

  1. 暢達(창달) - 의견이나 주장 따위를 막힘없이 널리 자유롭게 표현하고 전달함, 거침없이 쑥쑥 뻗어나감
  2. 愛撫(애무) - 사랑스럽게 어루만짐
  3. 案頭(안두) - 책상의 한쪽 가장자리
  4.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개역개정, 베드로후서 3:16)
  5.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셨으니 그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개역개정, 고린도후서 1:19)
  6. 齎來(재래) - 어떤 원인에 따른 결과를 가져옴
  7. 等事(등사) - [의존명사] 여러 일을 나열하다가 그 밖의 것들을 줄임을 나타내는 말
  8. 거저 - ‘그저의 방언
  9. 保持(보지) - 어떤 상태를 보전하여 간직함
  10. 스사로 - ‘스스로의 방언
  11. 相違(상위) - 서로 다르거나 어긋남
  12. 도모지 - ‘도무지의 옛말
  13. 遊戱(유희) - 즐겁게 놀며 장난함
  14. 徒勞(도로) - 아무 보람이 없는 수고
  15. 誼分(의분) - 사귀어서 정이 든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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