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2일 화요일

[범용기 제3권] (102) 北美留記 第二年 1975 - 한국의 민주화 인권옹호를 위한 예비회담에

한국의 민주화 인권옹호를 위한 예비회담에

 

장소는 제네바, 날짜는 19751113, 16

113 이상철 목사와 나는 제네바로 떠났다. 530P.M.에 홀랜드의 암스텔담을 향하여 날았다. 몬트리얼에서 약 한시간 머물고서는 들리는데 없다. 단숨에 대서양을 날랐다. 작은 섬으로 밖에 안보이는 영국의 상공을 스쳐 홀랜드의 암스텔담에 내렸다. 짐들은 공항 개별 보관 캐빈에 넣고 홀가분하게 버스로 시내에 들어갔다. 유람선에 올라 운하를 누빈다. 금강석 가는 공장, 렘브랜트[1]의 그림으로 메꿔진 박물관, 그 밖에 여러 명소를 보았지만 주마간산 격이었다.

8시에 공항에 돌아와 한시간 반만에 제네바에 내렸다. 오재식[2]과 손명걸[3]이 마중 나왔다. 회의장인 카톨릭 수녀원에로 직행했다. 이 닦고, 목욕하니 피곤이 풀린다.

115 한국인 끼리서만 예비회담 금후 민주운동의 방향과 정책설정을 토의 결정하기 위해서다. 점심 후에도 계속했다. 박상증[4] 집에서 저녁 초대, 일본인 대표들과 대담도 했다.

116 종일 회의

아프리카의 나이로비에 며칠 후에 모이는 W.C.C. 세계대회에 가는 도중, 민주화운동에 관심 있는 각국 대표들이 우선 제네바에 회동하여 공동전선을 형성해 보자는 것이었다. 박상증이 주선했고 미국 N.C.C. 간부들이 주동역할을 담당했다. 개회식에는 내가 “Keynote Speech”를 하도록 되어 있다.

크리스찬 선언 민주화 운동과 그 역사적 의미라는 선언문이 이미 영역돼 있었다. 이 선언문은 한국크리스찬 지도자들이 작성한 역사적인 Document로서 독일의 발멘선언[5] 이상으로 훌륭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것을 낭독함으로서 Keynote Speech에 대신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 거기에 다 들어 있기 때문이다. 거기 모인 각국 대표란 서독, 스웨덴, 미국, 캐나다, 일본 등에서 W.C.C. 총회에 가는 인원수대로였기에 회의실은 가득하게 찼었다. 그들은 한국민주운동을 지원할 구체안을 모색하다가 일종의 데드라인에 부딪힌 것 같았다. 왜냐하면 같은 사정의 나라가 아프리카, 필리핀, 중남미 등에 수두룩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 일을 한국에 집중시키려면 한국인 민주단체로서의 직접적인 진술과 지원호소가 필요하게 됐던 것이다.

이에 호응하기 위해서 한국인끼리 따로 지하실에 모여 “World Councel for Democracy in Korea”란 조직체를 만들고 간단한 규약과 임원과 사업 계획 등을 의결하고 이상철 목사가 대표로 본회의에 보고했다. 깊은 이해와 보다 효과적인 지원을 약속하고 산회했다.

영국 B.B.C. 촬영, 민혁당 무더기 교수형 당시의 광경이 T.V.로 상영됐다.


[각주]

  1. 램브란트(Rembrandt, 1606~1669) - 바로크 시대의 네덜란드 화가
  2. 오재식(1933~2013) - 제주도 출생. 서울대 종교학과, 예일대 대학원 코넬데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197012기독교사상에 전태일의 죽음에 대하여 어떤 예수의 죽음이라는 글을 발표하였다. 1971~1979년 아시아기독교협의회 도시산업선교부와 국제부 간사로 에큐메니칼 운동에 투신, 국내외 네트워크를 조직적으로 형성해 한국민주화운동 활동, 도시빈민 농민 노동자 지원하는 민중운동 조직전문가로 활동하였다. 1982~1988년까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선교훈련원장 겸 통일연구원장을 거쳐 스위스 제네바의 세계교회협의회 개발국장에 취임하여 전 세계 빈민국가를 돌보았다. 1994년 박원순 변호사와 함께 참여연대의 창립 주역이 되었다. 2002년 대북지원 활동을 인정받아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음
  3. 한국 전쟁 이후 선교사로 온 조지 오글 목사는 당시 신탄진교회의 손명걸 전도사와 한 방을 사용하면서 오명걸이라는 한국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기독교타임즈 20201010일자 기사] 손명걸 목사는 1967년 경 김용복, 이승만과 함께 북미주의 기독학자회를 조직하여 기독교인들의 민주화운동의 결집에 역할을 한다. 1975년과 1976년에 기독학자회 회장을 역임한다.
  4. 박상증 목사는 아버지가 일본에 선교사로 파송되었을 때 도쿄에서 태어났으며 6세 때 서울로 왔으며, 서울대 사학과를 중도에 그만두고 미국 캔터키로 유학을 가서 아버지의 권유로 성결교파 신학을 공부하였다. 아버지는 한국전쟁 때 납북되었고, 서울신학교에서 잠시 가르치다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서 활동하면서 WCC로 진출하였다. 1970년대 지명관 교수의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을 집필하는 것을 도우는 등 해외에서의 민주화 운동을 펼쳤다. 이후 2012년 대선 때 박근혜 대통령을 지지한 것에 대해 비판을 받았으며 그것으로 인해서 2014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2014~2017)에 임명되었을 때 거센 반발이 있었다.
  5. 19345월 나치즘에 대한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저항을 조직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루르 지방의 바르멘에서 열린 독일의 프로테스탄트 교회지도자들의 회의에서 바르멘 신학선언또는 바르멘 선언이라고 불리는 6개항을 채택했다. 이 선언은 나치의 이데올로기와 실천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반대 입장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여기에 중요한 신학적 영향을 미친 사람은 칼 바르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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