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3일 수요일

[범용기 제3권] (140) 野花園 餘錄 - 농민의 선한 목자와 이리 떼

농민의 선한 목자와 이리 떼

 

115() - 본국의 안희국 선생으로부터 편지가 왔다. 그는 경기도 용인에서 양계와 과수원 경영에 여념이 없다.

양계는 가까스로 부화시켜 3천수나 된다. 어느 농가에서도 이만큼은 할 수 있는 것이어서 전문가로서의 자랑은 못된다고 했다. 사료도 자작자급이 가능하다. 그런데 정부 소속인 농업조합에서 자기들의 이해(利害)에 맞춰 일방적으로 정한 가격에 따라 달걀 전부를 강제 매수한다.

사교값은 올린다. 생산자는 생산비도 안 되는 싼 값으로 계란을 내놓아야 한다. 달걀이 많을수록 손해도 많다. 그런 중에서 얼마를 몰래 시장에 내놓아 싯가대로 판매하는 암거래에서 생산비의 결손을 보충한다.

당장 집어치우고 싶다가도 닭들이 내 Pep[1]이니까, 아침마다 그것들을 보지 못하며는 나 자신이 서운해서 못 견디게 된다.

닭병이 돌아서 양계업자들이 전멸되는 경우에도 안 선생 닭들은 건재한다. 치밀한 방역(防疫)시설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역시 사랑의 기적이랄 수도 있겠다.

사과밭만은 재미보는 축이고 몇마지기 논에서 식량은 자급한다고 했다.

안 선생은 일본 청산학원 본과를 고학으로 졸업한, 역시 수재 축에 드는 실력가다. 한신대 실천신학 부문에서 농촌선교 담당교수로 있다가 그만두고 용인에서 한 가지 일에 헌신한 독지가다.

116() - 눈과 바람의 날이다.

사막 바람에 인간의 발자욱이 지워지듯, 눈보라에 길들이 백사(白沙)의 언덕이 됐다. 시내 사무실에 나가려 했으나 Subway까지 가는 Bus가 안 온다. 나는 집에 돌아와 눈을 친다. 울타리 바깥 보도의 눈을 삽으로 저며 내고 사람 하나 다닐만한 오솔길을 개통시켰다.

오가는 사람들이 고맙다고 인사한다. 나는 무슨 좋은 일이나 한 것 같아서 유쾌했다.

아내는 아무 것도 못 먹고 시들어 누워 있다.

119() - 오늘은 더 추운 것 같다. 영하 23도란다. 그래도 나는 시내 사무실에 나갔다.

6PMScaborough에 돌아온다. 로렌스에서 내려 다섯 블록을 걷는다. 나는 기()로 이긴다는 뱃장으로 귀가림도 없이 눈보라에 맞선다.

후에사 알았지만 귀와 손이 얼어서 해마다 겨울이면 가렵고 진물이 난다. 작금 양년에는 그 증세도 없어졌다. 지구전에 이긴 것이랄까.

나는 아직 소화기능이 활발할 때 많이 먹어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건 아플 때 꺼내 쓸 저축이다.

일하다가도 다소 시장기가 생기면 스텍이고 치킨이고 기껏 먹는다. 그러노라면 경용 집 정식 디너시간에는 무단결석이 잦게 된다.

여기 사람들처럼 그럴 경우에는 미리 주부에게 통고하는 예절도 지킬줄 모른다. 주부인 효순은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데 나는 나대로 시간을 지켜낼 수가 없다. 시간을 맞춰 떠난다해도 Bus니 전차니 지하철이니 하는 교통기관이 좀처럼 말을 듣지 않는다.

어떤 경우에는 30분 이상, 언 발을 구르면서 눈보라 속에 서 있어야 한다. 그러니 디너시간 못 지키는 데는 나로서는 나대로의 이유가 노상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경용과 효순에게는 미안한 것 뿐이다.

120() - 눈이 오며 말며 한다.

오늘은 4PM에 사무실을 나와 5:30PM에 경용 집에 왔다. 일찍 들어왔다고 경용이 맘 놓는다. 와 보니 경용도 할머니도 독감에 걸려 있다.

추워서 떤다. 집안에서 유별나게 추워 떤다는 것은 감기 때문이란 것이 상식이다.

나는 도대체 사무실에서 뭘 하노라고 그렇게 시간 다툼까지 하느냐? 주로 3간행 때문이다. 원고 쓰기, 원고 청탁과 교열, 원고 교정, 그리고 타이프에 부친다.

타이프 해 오면 그걸 편집하여 사진판에 박는다. 사진판이 오면 그걸 오려 대지에 붙인다. 편집의 마감매치다. 페이지수를 맞춰 페이지마다 아라비아 숫자를 기입한다. 목차를 만들고 표지를 고안해 붙인다. 뿐만 아니다. 부탁한 원고가 기일 안에 오지 못하면, 정기간행물이라서 초조해진다.

어떤 경우에는 허둥지둥 내가 써 넣어야 한다.

제본까지 되어 인쇄소에서 반입되면 발송작업에 바빠진다. 미국, 일본, 서독, 캐나다, 홍콩, 인도, 스웨덴, 영국 등 안 가는 데가 별로 없다.

2천부 가까이를 포장하고 개인은 개별 봉투에 넣고 거기에 발신인, 수신인을 적는다. 우체국까지의 반출은 정학필 장로가 맡아 수고해 준다.

지원금이 얼마 들어오지만 홍로점설”(紅爐點雪)[2]이다. 한번 내는데 약 6백불 가까이 결손이다. 그래도 엘리야를 자기 집에 피신시킨, 시돈 땅 사렙다에 사는, 가난한 과부의 마감 한줌 밀가루 축복받아 그 밀가루 독이 바닥나지 않고, 써도 써도 그만큼 도로 찼다는 기적이 3발간에도 있었더니라.

어쨌든, “3간행은 One man job으로 충분한 업량(業量)이다. 내가 시간을 지키지 못하는 것도 그 배후에 이런 고충이 있다.

이것은 정신적 왕국을 나와 같이 나누는 동지만이 알아주는 하느님 나라 비밀이기도 하다.

121() - 서희 첫 돐이다.

130() - 이현주 쓴 예수의 죽음이 관용에게서 왔다. 재미있게 읽었다.

130() - 음력 설날이다. 요새 몇 주일 동안에는 인철ㆍ혜원의 집에 자주 가게 된다. 언제 가도 미안할 것 없는 막내딸 집이라서 맘놓고 드나들게 된다. 그러나 본거지는 역시 경용 집이다.

아내는 거기서 앓기도 하고 병원에 다니기도 한다. 요새는 많이 나아서 기분도 상승(上昇) 도상에 있다.

시어머니 건강관리만 해도 둘째 며늘애 효순의 부담은 가벼운 것이 아니다.

24() - 서울의 관용ㆍ정희ㆍ명은에게서 길고 정다운 편지가 왔다. 재종질[3] 단용에게서도 편지가 왔다. 단용의 여동생인 혜경에게 첫 딸이 났단다. 이름을 지어 보내라는 부탁이다. 단용의 가족은 일제시대에 중국 서주(徐州)에서 살았기 때문에 이름을 서영”(徐榮)이라고 일컬어 알렸다.

강석원 박사가 Worldview지에 발표한 자기 논문 “President Park and his Learned Friends : Some Observations on Contemporary Korean Statecraft”을 오려 보냈다.

그는 정치학 전공의 학자로 현직 교수이기도 하다.

한때 한국의 독재정치에 반기를 들고 와싱톤, 뉴욕의 민주운동 패거리와 섞여 거리를 누비기도 했다. 그러나 계산이 안맞는다고 보았던지 다시 상아탑 속에 돌아가 학문의 사람으로 대학교단만을 지키고 있다.

종종 뼈대있는 논문을 발표하여 일반학계에서 존경을 받는다.

27() - 요새 나도 몸이 언짢다. 기침이 나고 담이 오르고 열이 나서 오한에 떤다. 경용 집에서는 노파가 누워 있기 때문에 나까지 그 뽄새[4]로 거기 가서 나란히 누워 있다는 것은 우선 노환(老患)[5]이 거창해 보이고 나 자신이 쑥스럽기도 할 것 같았다.

맏아들 은용이 와서 나를 모셔다가 준비된 침대에 누인다. 맏며느리 행강도 간호에 성의를 다한다.

29() - 경용 집에서 온수탕에 잠겨 전신을 덥히고[6] 나와서 잔다.

몸이 풀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건 일시의 눈가림이었다.

다음날인 210에는 어지럽고 위가 뒤집힌다.

212()은 향신(鄕信)[7]의 날이기도 했다. 서울 수유리의 막내들, 명은과 명혜 귀염둥이 손녀들, 명은의 외삼촌 덕주 씨, 모두 긴 편지를 써 보냈다. 사진도 들어 있다.

명은의 큰외삼촌 이현주 씨가 지은 단행본 예수의 죽음열권이 보내왔다. 한 책에 10불씩으로 팔아 보내라는 조건이 붙어 있다. 교회에 갖다 놓았더니 대번에 다 팔렸다. 곧 송금했다.

오늘 내 마음은 수유리에 가 있다.

212() - 내 건강은 완쾌의 경지에 접근한다.

시내 사무실에 나가 오랫동안 집필했다. 붓이 말듣기 시작하면 좀처럼 멈추지 않는다. 그래서 쓴다.

무슨 영기(靈氣)에 밀려 생각이 망각의 아비스[8]에서 뛰쳐 나온다. 부활한 생명이랄까, 묵은 것이 새 것으로 변질한다. 묵은 글도 새 몸 입고 나타난다.

졸작이라도 자기 그림은 돋보인다. 마찬가지로 인쇄된 자기 글의 최초, 또 최후까지의 애독자는 그 글의 필자라고들 한다.

219() - “葉書”(엽서)라는 短信(단신)[9] 6편을 썼다.

224() - 금호동 정자에게서 긴 편지가 왔다.

잘 된 글솜씨다. 27일에 회답을 보냈다.

229() - 이 목사 생일이다.

교회 간부들이 이 목사 집에 모여, 축하 파티를 열었다. 농담이 연발하여 웃음바다에 거품이 치솟는다.

31() - 서울서 이우정이 잡혔다는 소식이 왔다.

Ajac의 문재린 목사님이 눈길에 낙상, 절골(다리마디) 입원중이라서 이 목사와 둘이 위문갔다. 통증은 멎었다고 한다.

1976314() - 와싱톤에서 승규, 윤규와 그 식구들을 반갑게 만났다.

윤규는 의학박사다. 회교국가로서 백인 입국과 기독교선교를 거부하는 파키스탄에 의료선교사로 가라는 미국 외지선교부의 교섭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 후에 가족관계, 자녀교육 관계 등을 숙고한 나머지, 한국 부산에 있는 그의 개인병원 재개와 부산종합병원 특별전문의로 귀국했다. 윤규와 승규는 만우형의 두 아드님으로서 나를 아제씨[10]라고 부른다.

326() - 본국에서 오늘 이해영 목사가 별세했단다.

나는 혼자서 뉴욕 중앙공원을 하염없이 거닐고…….


[각주]

  1. pep 활기, 원기, 활력
  2. 홍로점설(紅爐點雪) - 빨갛게 달아오른 화로 위에 눈을 조금 부린 것과 같다는 뜻으로, 큰 일을 하는 데 있어 작은 힘으로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음을 이르는 말
  3. 재종질(再從姪) - 육촌 형제의 아들
  4. 뽄새 본새(어떤 행동이나 버릇 따위의 됨됨이)
  5. 노환(老患) - 늙어 쇠약해져서 생기는 병
  6. 덥히다 열을 가하여 높은 온도를 가지게 하다
  7. 향신(鄕信) - 고향에 관한 소식
  8. Abyss - 심연
  9. 단신(短信) - 짤막하게 전해지는 뉴스
  10. 아제씨 - ‘아저씨의 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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