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1일 월요일

[범용기 제3권] (33) 北美留記 第一年 1974 - 그래도 교회 안에는 자유

그래도 교회 안에는 자유

 

119() - 11:00AM에 신우관 건축위원회를 총회 사무실에서 열었다. 위원장 구실을 해야 하겠기에 그리로 갔다.

1:00PM에 경동교회에서 이명하 씨의 환갑기념 Party가 있어서 참석하고 기념 예배에서 설화했다. 예배 후에 별관에서 잔치가 있었다. 이명하는 함남 차호에서 해산물 도매상으로 일하던 독실한 교회인이자 정치관심도가 높은 청년이었는데 어느새 환갑이란다. 주태익[1], 임춘갑[2], 이범선[3] 등과 함께 함경도 순대집에서 순대백반을 먹고 9시쯤까지 잡담했다.


[각주]

  1. 주태익(朱泰益, 1918~1976) - 평안남도 대동 출신. 1940년 평양신학교 예과를 수료한 뒤 1942년 백합보육원을 경영하였다. 1947흥국시보를 비롯하여 기독교잡지의 편집을 맡아보다가 1948년부터 희곡과 방송극 집필을 시작하였다. 1964년 방송작가협회 부회장, 1968년 크리스천문학가협회 회장, 1971년에는 방송윤리위원을 지냈다.
  2. 임춘갑 일생을 키에르케고르와 씨름한 이색철학자. 해방 직후(1946) 서울대 문학부를 졸업하고 한국신학대학 강사, 무역진흥공사 감사, 보이스카웃 사무총장등을 역임하였다. [중앙일보 1979912일자 기사]
  3. 이범선(李範宣, 1920~1981) - 호는 학촌(鶴村). 평안남도 신안주 출신. 1938년 진남포공립상공학교를 졸업하고 평양에서 은행원으로 근무하다가 일제 말기에 평안북도 풍천 탄광에 징용되었다. 광복 후 월남해서 동국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고, 625 때는 거제고등학교에서 3년간 교편을 잡았다. 휘문고등학교, 숙명여자고등학교, 대광고등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였으며 한국외국어대학 전임강사(1968), 교수(1977)로 재직하였다. 작품으로는 학마을 사람들, 오발탄, 피해자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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