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교회 안에는 자유
1월 19일(토) - 11:00AM에 신우관 건축위원회를 총회 사무실에서 열었다. 위원장 구실을 해야 하겠기에 그리로 갔다.
1:00PM에 경동교회에서 이명하 씨의 환갑기념 Party가 있어서 참석하고 기념 예배에서 ‘설화’했다. 예배 후에 별관에서 잔치가 있었다. 이명하는 함남 차호에서 해산물 도매상으로 일하던 독실한 교회인이자 정치관심도가 높은 청년이었는데 어느새 환갑이란다. 주태익[1], 임춘갑[2], 이범선[3] 등과 함께 “함경도 순대집”에서 순대백반을 먹고 9시쯤까지 잡담했다.
[각주]
- 주태익(朱泰益, 1918~1976) - 평안남도 대동 출신. 1940년 평양신학교 예과를 수료한 뒤 1942년 백합보육원을 경영하였다. 1947년 『흥국시보』를 비롯하여 기독교잡지의 편집을 맡아보다가 1948년부터 희곡과 방송극 집필을 시작하였다. 1964년 방송작가협회 부회장, 1968년 크리스천문학가협회 회장, 1971년에는 방송윤리위원을 지냈다.
- 임춘갑 – 일생을 키에르케고르와 씨름한 이색철학자. 해방 직후(1946년) 서울대 문학부를 졸업하고 한국신학대학 강사, 무역진흥공사 감사, 보이스카웃 사무총장등을 역임하였다. [중앙일보 1979년 9월 12일자 기사]
- 이범선(李範宣, 1920~1981) - 호는 학촌(鶴村). 평안남도 신안주 출신. 1938년 진남포공립상공학교를 졸업하고 평양에서 은행원으로 근무하다가 일제 말기에 평안북도 풍천 탄광에 징용되었다. 광복 후 월남해서 동국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고, 6ㆍ25 때는 거제고등학교에서 3년간 교편을 잡았다. 휘문고등학교, 숙명여자고등학교, 대광고등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였으며 한국외국어대학 전임강사(1968), 교수(1977)로 재직하였다. 작품으로는 『학마을 사람들』, 『오발탄』, 『피해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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