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17일 수요일

[범용기 제4권] (100) 野花園餘錄(야화원여록) - 虛心(허심) 유재기 목사

虛心(허심) 유재기 목사

 

유재기[1] 목사의 허심이다. 그의 꿈은 한국 농촌진흥이었다. 그의 빈 마음에는 한국농촌의 현실이 파노라마(Panorama)로 나타난다. 일제시대부터 그는 한국농민의 짐을 나눠지고 숨가쁘게 걸었다. 쌀은 총독부에서 걷어간다. ‘보리고개를 넘기 전에 절량농민이 허리띠를 졸라매며 굶는다. ‘허심은 이 절량농민에게 뭔가를 주려고 서울바닥을 헤맨다. ‘해방이 되자 그의 꿈은 부풀었다.

숱한 적산가옥들을 접수했다. 농촌운동의 재원을 만들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심은 그리 순진하지 않았다. ‘동지라고 믿던 친구들이 자기 재산으로 빼어돌렸다. 그는 맘이 상했다. 그는 영락동에 있는 허주레한 목조건물에 드러누웠다. 그것도 물론 접수한 적산 중의 하나다. 부인과 자녀들이 고생을 나눈다. ‘허심은 심장충격으로 의식을 잃었다. 내게도 소식이 전해졌기에 달려갔다. 의식은 회복됐다. 여전히 밝고 맑은 얼굴에 그의 특유한 공소를 터뜨린다. 며칠 후에 충격이 다시 왔다. 이번에는 마감 순간이다. 그러나 그의 웃음은 여전했다. 얼마 후에 그는 갔다. 장례식에는 친구와 동역자와 농민대표 수백 명이 모여왔다. 함태영 옹이 식을 진행시켰다. 그리고 운구한다. 수십 명이 을 붙들고 울며 따른다. 동네 사람들도 구경삼아 나왔다.

저 사람이 뭐길래 저렇게들 야단이야?”

그들에게는 어느 가난뱅이 못난이로만 보였던 것이다.

영구[2]는 한강 건너 그가 심혈을 쏟은 어느 농촌 낮은 언덕에 내렸다. 다른 묘소는 가까이에 없었다. ‘성분[3]하고 비석을 세웠다.

농촌운동의 선구자 허심 유재기 목사 여기에 누웠다라고 새겼다.

후일에 바로 그 언덕 기슭에 공업단지가 생겼다. 농촌은 파괴됐고 허심의 유택[4]이 아직도 거기 있는지 모르겠다. 어디론가 사라졌을 것이다. 그는 낭만적인 시정의 사람이었다. 그는 시정으로 농민을 사랑했다. 그러나 선구자였음에는 틀림없겠다.

 

[1975]


[각주]

  1. 유재기(劉載奇, 1905~1949) - 경상북도 영주 출신으로 평양의 숭실전문학교에 진학했다. 숭실전문 재학 중 배민수와 교류했으며, 배민수에게서 조만식을 소개받아 기독교 기반의 농촌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숭실전문 졸업 후 평양신학교를 1934년에 졸업하고 목회자가 되었다. 1935년에는 목사 안수를 받고 경북의 여러 지역에서 목사로 근무했다. 유재기는 이미 1933조선일보에 교회 내 협동조합 설치에 대한 의견을 담은 협동조합론을 발표하는 등 교회를 기본 조직으로 삼는 농촌운동에 뜻을 두고 있었다. 칠곡군에서 협동조합을 설치하여 이같은 이론을 실천에 옮긴데 이어, 의성군에 목사로 부임한 뒤로는 교회 내 청년 조직을 키워 애국계몽운동의 추진력으로 삼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1938년 농우회 사건이 발생하면서 유재기는 주모자로 체포되었다. 옥고를 마치고 풀려난 뒤에 일제에 협조한 행적도 있다. 농우회 사건으로 복역한 공로를 인정받아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그러나 2008년 공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개신교 부문에도 포함되어 있다.
  2. 영구(靈柩) - 시체를 담아 넘는 관
  3. 성분(成墳) - 흙을 둥글게 쌓아올려 무덤을 만듦
  4. 유택(幽宅) - 송장이나 유골을 땅에 묻고 비석을 세우거나 떼를 입혀 표시를 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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