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17일 수요일

[범용기 제4권] (99) 野花園餘錄(야화원여록) - 松都(송도)

松都(송도)

 

송도개성’(開成)이라는 이름보다 훨씬 뉴앙스가 짙다. ‘송악’(松嶽)이 진산(鎭山)이겠지만, 서울의 북악처럼 우악스레[1] 내리 닥치지는 않았다. 좀 멀지감치 떨어져 있다.

일제시대 때, 나는 여러 번 송도에 들렀었다. 한번은 거기서 박연폭포[2]까지 걸은 일도 있다.

도읍의 판국은 작아도 차분했다. 남대문이 남아 있다. 규모가 작다.

 

* * *

 

송도에서는 만월대[3]눈동자랄까. 아무리 둔해도 감회없이 거닐 수 없는 궁궐터다. 일인들은 고적보존에 성실한 습성이 있다. 그래서 기와, 벽돌, 섬돌, 주춧돌 등등이 파편의 황야5백년을 잠자고 있었다. 어릴 때 들은 한시한 구절이 제절로 떠오른다. 논산 기생이 만월대를 보며 지은 즉흥시다.

 

論山佳妓過松京(논산가기과송경)

滿月台空水繞城(만월대공수요성)

繁華三百年前事(번화삼백년전사)

畵人靑山杜宇聲(화인청산두우성)

 

논산의 예쁜 기녀 송경에 들렀네

만월대는 비었고 물만 둘러 흐르네

삼백년 전 번화 얘기 어디서 들을까

모두 모두 푸른 산 두견새 소리로세. (직역)


선죽교[1] 다리목 정포은[5]의 비각에 순례한다. 비석이 눈물로 젖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이방원이 쿠데타에 협력을 요청한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서 百年까지 하리라

 

정포은이 대답한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줄이 있으랴.”

 

그래서 포은은 선죽교에서 조영규[6]에게 맞아 죽었다. 그 피가 너무 붉어 선죽교 돌다리, 냉혹한 심장에까지 스며들어 5백년 후 오늘에도 돌마다 피 흔적이 붉다고 했다.

나는 돌들을 유심스레 봤다. 붉은 줄 섞인 화강암이었다. 돌 자체가 그렇게 생긴 것임에 틀림없겠다. 그러나 그것이 포은의 피 흔적이라는 전설이 무심한 돌멩이까지 포은화 하고 충신화 했다. ‘절개를 절규한다.

 

[1936]


[각주]

  1. 우악스레 무식하며 모질며 거친 데가 있게
  2. 박연폭포(朴淵瀑布) - 경기도 개풍군 영북면(嶺北面) 천마산(天磨山)에 있는 폭포. 높이가 20미터에 달하며, 흔히 송도삼절(松都三絶)의 하나로 꼽힌다.
  3. 만월대(滿月臺) - 개성시 송악산 남쪽 기슭에 있는 고려의 궁궐 터. 919(태조 2)년에 태조가 송악산 남쪽 기슭에 도읍을 정하고 궁궐을 창건한 이후 1361(공민왕 10)년 홍건적의 침입으로 소실될 때까지 고려 왕들의 주된 거처였다.
  4. 선죽교(善竹橋) - 경기도 개성에 있는 돌다리. 고려 말기의 충신 정몽주가 이성계를 문병하고 돌아오다가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 보낸 조영규 등에게 철퇴를 맞고 죽은 곳이다.
  5. 고려 말기의 문신(1337~1392). 자는 달가(達可)이고 호는 포은(圃隱),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1392년 조준, 정도전 등이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려 하자, 이를 반대하고 끝까지 고려 왕조에 충성을 바치다가 선죽교에서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의 부하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의창(義倉)을 세워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고 유학을 보급하였으며, 성리학에 뛰어났다. 저서에 포은집(圃隱集)이 있고, 시조로 <단심가(丹心歌)>가 전한다.
  6. 조영규(?~1395) - 본관은 신창(新昌). 신창조씨(新昌趙氏)의 시조. 초명은 조평(趙評). 조상의 가계가 불분명하고 이성계의 사병으로 시작하여 군공을 세워 출세했던 것으로 보아 일반 평민 출신으로 추측된다. 1392(공양왕 4)에 이방원(李芳遠)과 모의하여 이성계의 문병을 마치고 돌아가는 정몽주를 선죽교(善竹橋)에서 격살하는 데 주동적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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