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18일 목요일

[범용기 제4권] (106) 독립을 향한 선렬들의 가시밭 행군 - 해방은 선열들의 피밭에서 자랐다

해방은 선열들의 피밭에서 자랐다

 

통일이 우리 역사의 본연태’(本然態)라면 분단변태’(變態) 현상이다.

19458월 해방은 거지가 얼결에 잔치상받은 것도 아니었고 중이 공양미 받은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 민족, 우리나라를 한일합방이라는 최대의 변태현상에서 본연의 모습으로 회복하려는 국내국외의 독립투사들과 의식화한 국민의 끈질긴 장기전에 대한 보답이었다.

현실적인 가능성 때문에 주로 국외에서 운동이 활발했다는 것은 원칙보다도 기능’(機能)에 속한 과제라 하겠다.

중국에서는 김구, 김규식, 김원봉, 홍진[1] 등등이 중국 국민당 정권과 협력하여 조선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김두봉 일파는 중국 공산당과 협력, 박용만, 이승만, 안창호 등은 미국정부와 협력하였고, 만주에서는 철기 김좌진 장군, 소련에서는 이동휘 등등이 각기 그 있는 고장에서 광복운동에 전력했다. 김일성의 관동군 상대 유격전에 대하여는 별도로 다루려 한다.

어쨌든, 194510월에 김구, 김규식, 김원봉, 홍진, 최동오, 조소앙, 윤기섭, 장건상[2], 김성숙[3] 등이 연립적인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세력의 통일전선을 실현시켰다. 임시정부는 에스토니아, 중국, 소련, 불란서의 승인을 얻었고, 1941129일에 일본에 선전을 포고했다. 광복군은 국민당 정부군 지휘하에, 김두봉의 독립동맹군은 연안의 팔로군(중국공산군) 지휘하에 참전했다. 임시정부가 연합국의 일원으로 일본군과 전투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므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그 역사적 투쟁의 기록으로, 승리의 초점인 포츠담 선언에서 중요한 부서에 들어야 할 것이었다. 그런데 194599, 미국의 태평양 방면 육군 총사령관 맥아더는 북위 38도선 이남은 전권이 내 손에 있다고 포고했다.

후일에 임시정부 요인들은 개인자격으로 겨우 본국에 돌아왔다. 이것도 변태현상이다.


[각주]

  1. 홍진(洪震, 1877~1946) - 본관은 풍산(豊山). 초명은 홍면희(洪冕熹), 일명 홍진(洪鎭). 호는 만호(晩湖晩悟). 충청북도 영동 출신이다. 1898년 법관양성소(法官養成所)를 졸업한 뒤 한성평리원(漢城平理院) 주사에 임명되었다. 다음 해 평리원 판사로 승진하였고, 1905년 충청북도 충주재판소 검사로 전임되었다. 19108월 나라가 일제에 강점당하자 검사직을 사임하고 서울에서 변호사 개업을 한 뒤, 19192월까지 독립운동가를 위해 법정투쟁을 계속하였다. 그 해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적극 가담하여 충청북도 청주군 연락책임자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4월 인천시 만국공원에서 비밀리에 13도 대표들과 국민대회(國民大會)를 열고 한성임시정부(漢城臨時政府)를 조직한 뒤 법무차장에 선임되었다. 그 뒤 상해(上海)로 망명,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합류하여 활동하였다. 1940년 광복진선의 9개 단체가 통일하여 한국독립당을 조직하자 중앙감찰위원장에 선임되어 한국광복군을 창설하는 데 전력, 총사령부를 설치하였다.
  2. 장건상(張建相, 1883~1974) - 호는 소해(宵海). 경상북도 칠곡 출신. 좌천재(佐川齋)에서 한문을 배운 뒤 육영재(育英齋)에서 12년간 신학문을 공부하고, 게일(Gale,J.S.) 목사에게 영어를 배웠다. 1905년 동경(東京)으로 가서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정치학과에 입학했으나, 미국 공사관 무관인 이스트 레이크 밑에서 군사훈련을 받다 발각되어 퇴학당한 뒤 미국으로 갔다. 게일 목사의 추천으로 1908년 발프레스 예비학교를 거쳐 인디애나주립대학 법학과에서 공부하였다. 대학 졸업 뒤 항일투쟁에 직접 투신하려고 1917년 상해(上海)로 가서 동제사(同濟社)에 가입했고, 임시정부가 수립된 뒤에는 외무차장이 되었다. 1921년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대회에 참석, 정치부위원으로 선출된 뒤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제3인터내셔널 3차대회에 참석, 레닌과 만났다. 이를 계기로 코민테른과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 사이의 연락업무를 담당하였다. 광복 후 귀국하여 여운형(呂運亨)계의 조선인민당과 근로인민당의 부위원장을 지냈고, 1950530선거에서는 부산에서 출마, 옥중에서 전국 2위의 최다 득표로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 뒤에도 혁신적인 정치 세력으로 남아 당국의 주목을 받던 중 간첩 박정호(朴正鎬)사건과 연루되어 구속되었다가 풀려났다. 516 이후 혁신당(革新黨)사건으로 검거되어 징역 5년을 선고받았으나 노령 등의 이유로 석방된 뒤 정릉에 있는 오두막집에서 여생을 보냈다.
  3. 김성숙(金星淑, 1898~1969) - 평안북도 철산 출신. 본관은 철산. 어릴 때 이름은 성암(星巖), 호는 운암(雲巖). 성숙(星淑)은 법명. 19세 때 용문사에서 출가해 31운동에 참여했으며, 25세 때 스님 신분으로 중국 북경에 유학한 뒤 중국 각지를 돌며 본격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1942년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단결을 강화하기 위해 민족전선연맹을 해체하였으며, 이 때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취임하였다. 해방 이후, 1947년 여운형과 같이 근로인민당을 조직하고 중앙위원에 뽑혔다. 또한, 장건상과 행동을 같이하여 당내 우파세력을 형성하고 극좌노선을 배격하였으나, 창당 2개월 만에 당수인 여운형이 피살되어 당세가 크게 후퇴하였다. 결국 남북협상을 전후하여 좌파의 인사들은 월북하고, 이승만 정권에 백안시되던 당을 그 해 12월 해체하였다. 625전쟁이 일어났을 때 서울에 남았으며, 14후퇴 때 비로소 부산으로 피신하였으나 부역혐의로 옥고를 치렀다. 1955년에는 조봉암(曺奉岩)ㆍ서상일(徐相日) 등 혁신계의 지도급 인사들과 접촉하여 진보당추진준비위원회에 관계하였으며, 이로 인해 이른바 근로인민당재건사건과 진보당사건으로 큰 탄압을 받았다. 1960419혁명이 일어나자 사회대중당을 창당하고 총무위원이 되었으며, 다음해 통일사회당으로 통합되자 정치위원이 되었다. 1961516군사정변 후 이른바 통일사회당사건으로 10개월간 옥고를 치렀으며, 1966년 재야통합야당인 신민당 창당에 참여하여 운영위원을 거쳐 지도위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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