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18일 목요일

[범용기 제4권] (107) 독립을 향한 선렬들의 가시밭 행군 - 3ㆍ1 독립선언과 그 후

31 독립선언과 그 후

 

191931손병희 등 33인이 민족대표로 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전국에 반일데모가 전개되었다. 일제무장군경에 살해된 동포 7,509, 부상자 15,961, 검거된 자 46,948명이다. 파괴된 건물은 교회당 47, 학교 2, 민가 715였다. 31에서 5월말까지 각지에서 벌어진 데모’ 1,542, 참가자 223만이다. 총독부 집계와 민간수집재료가 그 수에 다소 차이는 있으나 대체로 비슷하다. 참가자 수 같은 것을 정확하게 집계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필자 주)

19193현순[1], 여운형, 김혁 등이 상해에 조선독립 임시사무소를 설치했다.

19194현순 등 28지사가 조선 망명 정부 발기, 1회 임시의정원 회의를 개최했다. 의장 이동녕, 부의장 손정도, 임시헌장, 10조 의결, 국호는 대한민국, 국무위원 선출결과 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법무총장 이시영, 군무총장 이동휘 등등이었다.

19194이동휘는 만주 유하현에 31운동 이후 만주에 온 청년들을 규합 대한독립단을 결성했다.

19195이동휘가 설립한 신흥강습소를 신흥군관학교[2]로 개칭했다.

19196오현주[3], 이정숙[4], 오현관[5] 등이 조직한 혈성위원국부인회[6]와 최숙자, 김희렬, 백성현 등이 조직한 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7]가 합하여 대한국민애국부인회가 되고 회장에 박마리아[8], 부회장에 이혜경을 선출했다.

19198임시정부 국무총리로 추대된 이승만이 대통령 칭호를 요구하고 취임을 거부했기 때문에 군무총장 이동휘가 총리로 됐다.

19199강우규[9]가 제등 총독에게 폭탄을 던졌다.

191910만주에 대한정의군정사(政司)[10], 대한청년단연합회[11], 광복군총영[12], 북간도국민회[13] 소속 독립군 등의 독립군이 창설됐다.

191911김원봉이 의열단[14]을 조직하고 항일투쟁 직접행동의 선봉에 섰다.

192012만주에서 김좌진이 길림성 화룡현 청산리에서 일본군 9백 명을 섬멸했다.[15]

192012이동휘 주동으로 만주의 대한독립군, 서로군정서, 북로군정서, 군무도감부, 광복단 등이 통합되어 간도 대한독립군단[16]이 조직됐다.

19211이루구꾸에 본부를 옮겨 고려혁명군[17]으로 조직을 확대했다.

고려혁명군은 후에 볼세비키군과 충돌하여 궤멸적인 타격을 받았다. 그것이 소위 흑룡강사건[18]이다.

192112월부터 일본군은 간도의 조선인민을 무차별 학살했다.[19] 그때 웅상의 송창근 종형 송창회도 일가족과 함께 학살됐다.

19223독립군 행동부대가 상해부두에서 일본육군대장 다나까(田中義一)에게 폭탄을 던졌다.

19228만주의 서로군정서, 한족회, 대한독립단, 광복군총영, 만주광복군사령부, 광한회, 대한국민단 등 여덟 단체가 통합하여 대한통의부(통군관)[20]를 조직했다.

19229관동대지진 때, 일본정부는 동경재류 조선인 6천명을 이유없이 학살했다.

19231김상옥[21]이 경성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졌다.

19255총독부는 치안유지법을 제정 실시했다. 다수가 검거됐다.

19256총독부 경무국장 三天富松과 만주 동삼성 정권수반 장작림[22]삼시협정[23]을 맺고 조선인독립운동단체를 공동으로 탄압하게 했다.

1926120백만수, 신석우[24], 안재홍, 이상재, 권동진[25], 홍명희[26] 등 말하자면 민족주의자,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계열이 총망라되어 34명이 신간회[27]를 조직했다. 지회 백수십개소, 회원 삼만이었다.

19275애국부인회와 중앙여자청년회가 통합하여 근우회(槿友會)[28]로 발족했다. 정칠봉, 우봉운[29], 박호진, 허정숙[30] 등이 활약했으며 지회 30개소였다.

1927만주 길림에서 조선독립운동자 전면 대검거가 있었다.

19283김구, 이동녕, 이시영 등이 한국독립당을 조직했다.

1929113신간회 관련하에 광주학생사건[31]이 일어나 전국적인 반일운동이 전개됐다.

1930조선총독부는 독립운동자 18,811명을 검거했다.

19319일본군이 만주를 침략했다.

19323일본군이 상해를 침범했다.

19323일본군이 만주국을 건국했다.

19325임시정부를 절강성 항주(杭州)에 옮겼다.

1932임시정부는 이승만을 제네바 국제연맹 회의에 파견했다.

1941128일본군이 진주만을 기습 태평양전쟁이 시작됐다.

19424중국 국민정부는 중경에 옮겼다. 같이 옮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정식 승인했다.

19427임시정부 산하의 광복군은 중국군 지휘하에 들었다.

194210독립운동세력의 좌우 두파가 통합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양파연합내각으로 개편했다. 좌파는 조선민족의용대를 광복군 지대로 하여 임정에 편입시켰다. 의정원은 의장에 홍진, 부의장에 최동오, 내각은 주석에 김구, 부주석 김규식, 군무총장 김원봉, 중국군지휘하에 편입된 광복군은 부사령관에 김원봉, 참모장이 김홍일[32]이었다.

194211일본 정부는 조선인에게도 징병제도를 실시했다. 그래서 조선 학도병을 전쟁 일선에 강제 출전시켰다.

194210조선어학회[33] 사건으로 이극로[34], 이윤재[35], 최현배[36], 김윤경[37], 장지영[38], 이희승[39] 등 수십명이 투옥됐다. 동시에 국내 흥사단원들도 투옥됐다. 국내에서는 수양동우회[40]란 이름을 갖고 있었고 그 주동인물은 이광수, 주요한, 백영렵[41], 김병연 등등이었다.


부기 : 조선인 망명정권은 셋이 있었다.

 

(1) 1919317일 연해주에서 결성된 국민회의[42], (2) 1919410일 상해에서 결성된 대한민국임시정부[43], (3) 1919423일 서울에서 결성된 국민대회[44]이었다. 장래 국내인민 대표로서 의정원을 구성한다는 조건으로 상해임시정부를 법통적 망명정권으로 한다는데 합의했다.

연해주 국민회의는 이동휘 주동으로, 상해임시정부보다 먼저 조직된 망명정부였으므로 상해임시정부와의 합류를 반대하는 요인들이 많았었으나 이동휘가 상해임시정부의 기능적 우위(優位)를 역설하여 상해임시정부에의 합류가 승인된 것이었다.


[각주]

  1. 현순(玄楯, 1880~1968) - 일제강점기 13도대표 국민대회 평정관, 임시정부 외무차장, 내무부차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일명 송원상(宋元相). 서울 출신. 191931운동 때 목사로서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그 뒤 평화회의가 열리는 중국 상해(上海)에 밀파되어 주도자인 미국 대통령 윌슨(Wilson, T. W.)과 평화회의측에 독립청원서를 전달하였다. 1919년 서울에서 개최된 국내 13도대표의 국민대회(國民大會)에서 평정관(評政官)으로 선임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410일 이동녕(李東寧)ㆍ손정도(孫貞道) 29명과 함께 제1회 임시의정원 회의를 개최하고 조소앙(趙素昻)ㆍ남형우(南亨祐)ㆍ이시영(李始榮)ㆍ한기악(韓基岳) 등이 기초한 임시헌장 10개 조를 통과시킴으로써 413일 역사적인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2.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 191953일 만주에 설립되었던 독립군 양성학교. 1909년 신민회(新民會)는 만주에 독립군기지를 건설하기로 하고 이동녕(李東寧)ㆍ이회영(李會榮)ㆍ장유순(張裕淳) 등을 기지 건설지 답사를 위해 만주에 파견하였다. 19107월 이들은 남만주 유하현 삼원보 추가가(柳河縣三源堡鄒家街)에 우선 정착하였다. 그 뒤 토착민의 배척이 심해 일상생활에 지장을 많이 받았으나, 1911년 봄 한인자치기관인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국내에서 모여드는 청년들에게 구국이념과 항일정신을 고취시켜 조국광복의 중견간부로 양성시킬 목적으로 신흥강습소를 설치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이었다.
  3. 오현주(吳玄州, 1894~1989) - 일제 강점기에 독립 운동 단체인 대한민국애국부인회에 가담했다가 이 조직을 경찰에 밀고한 인물. 충청남도 공주 출생으로,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의 첫 한국인 교장이며 사회사업가인 오긍선의 동생이다. 일찍이 배재학당에서 신학문을 배운 오긍선의 영향으로 언니인 오현관과 함께 신교육을 받고 여성 운동에 참여했다. 오현주는 남편 강낙원의 권유로 조직에서 손을 뗀 뒤, 남편과 함께 김마리아 등 옛 동지들을 밀고해 관련자들을 모두 체포되도록 했다. 광복 후인 1949년 오현주는 남편과 함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의해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다. 이때 그는 남편이 데려온 유근수가 경찰인 줄 모르고 대한민국애국부인회 조직에 대해 알려준 것뿐이라고 증언했으나, 자신이 동지들을 밀고했다는 사실 자체는 부인하지 못했다. 반민특위가 해체되면서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았다.
  4. 이정숙(李貞淑, 1858~1935) - 대한제국기 명신여학교 초대교장을 역임한 교육자. 본관은 전주(全州). 경기도 양주 출생. 이해석(李海石)의 둘째딸이다. 16세 때 신정왕후(神貞王后))의 조카인 조영하(趙寧夏)와 혼인하였다. 19066월 엄황귀비의 후원을 받아 종로구 수송동에 명신여학교(明信女學校)를 설립하고 초대교장에 취임하였다. 1935년 임종 직전에 퇴직금 전액을 학교법인 숙명학원(淑明學院)에 장학기금으로 희사하였다. 현재까지도 제자 및 졸업생들의 협찬으로 이정숙 장학회가 계속 운영되고 있다.
  5. 오현관(吳玄觀) -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애국부인회 총재, 재무부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재령 명신여학교(明信女學校) 교사로 있다가 31운동 발발 직후 상경하여, 19193월 정신여학교 동창인 이정숙(李貞淑)ㆍ오현주(吳玄洲)와 함께 정신여학교 학생 및 그 밖의 동지를 규합하여 혈성단애국부인회(血誠團愛國婦人會)를 조직하였다. 이 조직을 통해 31운동을 하다 투옥된 독립운동가의 옥바라지 및 가족의 생계지원 활동을 하였다. 회비와 회원이 만든 수예품 판매로 얻은 수익금을 군자금으로 송부하는 활동을 하다가, 191911월 오현주의 배반으로 동지들과 함께 잡혔다.
  6. 혈성단애국부인회(血誠團愛國婦人會) - 1919년 서울에서 조직되었던 여성독립운동단체. 정신여학교 동창인 장선희(張善禧)ㆍ이정숙(李貞淑)ㆍ오현주(吳玄洲)ㆍ오현관(吳玄觀)ㆍ이성완(李誠完) 등이 중심이 되어 정신여학교 생도들과 뜻을 같이하는 동지를 규합하여 31운동으로 수감된 민족지도자들의 사식 차입과 그 가족들의 생활 구제를 위하여 31운동 후 첫 비밀여성단체를 조직, 활약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청년회 교단의 이병철(李秉澈)의 주선으로 조직된 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가 같은 목적의 독립운동을 추진하면서 양 부인회의 통합을 제의하므로, 같은 해 5월에 국내 항일여성운동계의 대표로 김원경(金元慶)을 파견하고 양 부인회의 통합 작업을 추진하여 6월에 대한민국애국부인회로 조직되었다.
  7. 대한민국애국부인회(大韓民國愛國婦人會) -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후 이를 지원하면서 그 산하에서 독립운동을 추진하기 위해 조직된 항일여성단체. 19193월 중순, 오현주(吳玄洲)ㆍ오현관(吳玄觀)ㆍ이정숙(李貞淑) 등이 31운동 투옥지사에 대한 옥바라지를 목적으로 혈성단부인회를 조직ㆍ활동하였다. 4월에는 최숙자(崔淑子)ㆍ김희옥(金熙玉) 등이 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를 조직하였다. 두 부인회는 그 해 6월 임시정부에 대한 군자금 지원을 위해 통합하였다. 지방에 다수의 지부까지 두었으나 활약이 부진하자, 김마리아(金瑪利亞)와 간부들은 발전적 해체를 통한 재조직에 의견 일치를 보았다. 이에 17명이 김마리아 거처인 천교장 2층에서 장시간의 비밀회합 끝에 새로운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탄생시켰던 것이다. 애국부인회 활동이 활발히 추진되던 그 해 11월말 경 한 간부의 배신으로 서울과 지방의 간부 및 회원들이 경상북도 고등계 형사들에 의해 일제히 체포되어 대구경찰에서 취조를 받았다. 취조를 받은 사람은 52명이었으며, 그 중 43명은 불기소로 풀려나고 김마리아 등 9명만 기소되었다.
  8. 박마리아가 아니라 김마리아(金瑪利亞, 1892~1944). 본관은 광산(光山). 황해도 장연(長淵) 출신. 아버지는 김윤방(金允邦), 어머니는 김몽은(金蒙恩)이다. 아버지는 한학자로, 서상륜(徐相崙)으로부터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여 마을에 교회와 학교를 세웠다. 1895년에 아버지를, 1904년에 어머니를 여의었다. 대학공부까지 하라는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1905년 서울로 올라와 노백린(盧伯麟김규식(金奎植유동열(柳東悅이동휘(李東輝이갑(李甲) 등 애국지사들의 출입이 잦은 삼촌 김필순(金弼淳)의 집에서 공부를 계속하였다. 1906년 이화학당(梨花學堂)에 입학했다가 교파 관계(敎派關係)로 곧 연동여학교(延東女學校, 현 정신여자중학교)로 전학, 1910년에 졸업하였다. 그 뒤 3년 동안 광주 수피아여학교에서 교사를 지냈고, 1913년 모교인 정신여학교로 전근한 뒤 이듬해 일본으로 유학하였다. 일본 히로시마[廣島]의 긴조여학교[錦城女學校]와 히로시마여학교에서 1년간 일어와 영어를 수학한 뒤, 1915년 동경여자학원 대학예비과에 입학하였다. 1918년 말경 동경유학생 독립단에 가담, 황에스터[黃愛施德] 등과 구국동지가 되었다. 191928독립운동에 가담, 활약하다 일본 경찰에 붙잡혀 조사를 받은 뒤 풀려났다. 19199월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조직하고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11월 말 애국부인회 관계자들과 붙잡혀 심문을 받고 3년형의 판결을 받고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이후 상해로 망명하였다. 상해에서도 상해애국부인회(上海愛國婦人會) 간부와 의정원 의원 등으로 활약하였으며, 수학을 계속하기 위해 중국 난징[南京]의 금릉대학(金陵大學)에 입학하였다. 19236월 미국으로 가 19249월 파크대학 문학부에서 2년간 수학하였다. 1928년에는 시카고대학 사회학과에서 수학, 석사학위를 받고, 1930년 뉴욕 비블리컬 세미너리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원산에 있는 마르타 윌슨신학교에서 신학강의만을 한다는 조건으로 1935년 귀국, 이후 여생을 기독교전도사업과 신학 발전에 기여하였다. 고문의 후유증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순국하였는데, 김마리아의 유언에 따라 시체는 화장하여 대동강에 뿌렸다.
  9. 강우규(姜宇奎, 1855~1920) -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찬구(燦九), 호는 왈우(曰愚). 평안남도 덕천 출신. 1884년 함경남도 홍원군으로 이사하여 한약방을 열었으며 또 기독교신자가 되었다. 1911년 북간도 두도구(頭道溝)로 망명하여 연해주를 넘나들면서 뜻있는 동료들을 만나 조국의 독립을 의논하였다. 191992일 총독 사이토[齋藤實]이 부임차 남대문 정거장에 도착해 마차에 오를 때, 품에 지니고 있던 수류탄을 던졌으나 실패하고, 신문기자ㆍ수행원ㆍ일본경찰 등 37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사상자 중에는 총독부 정무총감과 만철이사(滿鐵理事), 미국 뉴욕시장의 딸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거사에서 총독 사이토는 화를 입지 않았다. 거사 뒤 현장에서 유유히 빠져나와서 오태영(吳泰泳)의 소개로 장익규(張翊奎)ㆍ임승화(林昇華) 등의 집을 숨어다니다가, 917일 일제의 앞잡이 김태석(金泰錫)에게 붙잡혔다. 19203월 경성지방법원 1회 공판 당시 최자남ㆍ허형ㆍ오태영 등이 공범으로 피수되었다. 112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당하기 직전 단두대 위에도 봄바람은 있는데, 몸은 있어도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상이 없으리오라는 사세시(辭世詩)를 남겼다.
  10. 대한정의군정사(大韓正義軍政司) - 1919년 만주에서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 주도 인물은 한말에 의병운동을 전개했던 이규(李圭)ㆍ강희(姜熹)ㆍ이동주(李東柱)ㆍ조동식(趙東植) 등이다. 이들은 대한제국 때의 구군인들과 회동해 191931운동 후 항일전투기관인 대한정의단임시군정부(大韓正義團臨時軍政府)를 안도현(安圖縣) 내두산(奶頭山)에서 조직하였다. 19208월 일본군의 협공작전으로 영안현(寧安縣)으로 퇴각하였다. 결국, 그해 12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대표 서일(徐一), 대한독립군 대표 홍범도(洪範圖), 대한국민회 대표 구춘선(具春先), 대한신민회 대표 김성배(金聖培), 광복단 대표 이범윤(李範允) 등이 밀산(密山)에 모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할 때 흡수되었다.
  11. 대한청년단연합회(大韓靑年團聯合會) - 1919년 만주에서 각 지방 청년단의 집결체로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 오학수(吳學洙)ㆍ지응진(池應晉, 일명 仲振)ㆍ함석은(咸錫殷)ㆍ김창수(金昌洙)ㆍ김시점(金時漸)ㆍ김승만(金承萬)ㆍ오능조(吳能祚)ㆍ박춘근(朴春根)ㆍ이영식(李英植)ㆍ송연주(宋連周)ㆍ장재순(張載舜)ㆍ곽상하(郭尙夏)ㆍ장자일(張子一)ㆍ차경신(車敬信)ㆍ오동진(吳東振)ㆍ백일진(白日鎭)ㆍ이애시(李愛施) 등 각 지방 청년단 대표 17명이 각지의 청년단을 통일하고 통일방침 하에 독립운동을 계속할 것을 기도, 191911월 이 회의 설립취지서를 발송하였다. 그 해 12월 제1회 총회에서 총재 김승만, 부총재 박춘근, 총무 김찬성(金燦星) 등이 임명되었다. 이후 안병찬(安秉瓚)이 석방되어 대한청년단연합회에 참여하자 간부진은 개편되었다. 총재 안병찬, 부총재 김찬성, 총무부장 김승만, 서무부장 최지화(崔志化), 재무부장 김시점, 편집부장 이춘근(李春根), 교육부장 이탁(李鐸), 통신부장 오학수, 교제부장 김두만(金斗萬), 노동부장 박춘근, 경호부장 여순근(呂淳根)을 선출하였다. 기관지 주필은 오능조였다. 총재 안병찬이 상해(上海)로 가고 김찬성이 북경(北京)으로 가자, 김승만이 조직을 이끌다가 1920년 민국독립단과 연합하여 광복군사령부로 발전적 해체를 하였다. 기관지로 대한청년보(大韓靑年報)를 발행하였다.
  12.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 -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20726대한광복군참리부규정, 대한광복군사령부규정, 대한광복군영규정를 제정하고 81일을 시행일로 삼아 광복군사령부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무장독립군과 소통이 원활하지 못했다. 서간도 지역에서는 임시정부의 법령 제정에 앞서 임시정부를 구심점으로 삼아 19204월 무장독립군 통합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7월 광복군총영을 조직하였다. 광복군총영은 임시정부 군무부 산하 정규군을 표명하였으나, 임시정부와 소통이 원활하지 않아 법령상 광복군사령부 편제와 달랐다. 또 이미 편제된 군대를 갑자기 재편하는 데도 애로사항이 많았으므로, 광복군총영은 자체적으로 조직을 개편하며 운영하였다. 오동진(吳東振)은 관전현(寬甸縣) 향로구(香爐溝)에서 광복군총영을 조직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으며 총영장에 취임하였다. 곧 국내의 천마산대(天摩山隊)를 광복군천마별영으로, 벽동(碧潼) 파저강(波瀦江) 연안의 무장단체를 벽파별영으로 하였다. 그 뒤 1922년 여러 독립운동단체가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로 개편될 때 이에 흡수되었다.
  13. 북간도국민회(北間島國民會) - 1910년대 간도 이주 동포 중 기독교에 귀의한 교포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된 자치기관. 처음에는 연변교민회(延邊僑民會)로 만들어져, 김약연(金躍淵)ㆍ구춘선(具春先)ㆍ김영학(金永學)ㆍ마진(馬晉)ㆍ강백규(姜伯奎) 등이 중심이 되어 일을 하였다. 1914년 이동휘(李東輝)가 명동(明東)에 온 것을 계기로 구국운동으로 활동 방향을 높일 것을 맹세하였다. 1919313, 간도 용정(龍井)에서 독립선언서 발표식을 했는데, 이를 계기로 명동을 본거지로 하여 명동중학교(明東中學校)를 설립하였다. 이상설(李相卨)이 세운 용정의 서전서숙(瑞甸書塾)의 정신에 입각해 현대적인 교육을 실시하자 한국ㆍ중국ㆍ노령(露領) 등지에서 유학생이 모여들었다. 이 학교는 비록 중학교였지만 학생은 대부분 성인들이었고, 국민회는 이 학교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의 기반을 삼아 독립사상과 애국 정신을 드높이는 데 주력하였다. 교장은 국민회장이 겸임했다.
  14. 의열단(義烈團) - 191911월 만주에서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 1920년대에 활발한 활동을 보였으며, 1920년대 말부터 1930년대에 걸쳐 민족주의 급진파를 표방하는 단체로 변모되어 갔다.
  15. 192010월 김좌진(金佐鎭)ㆍ나중소(羅仲昭)ㆍ이범석(李範奭)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군(北路軍政署軍)과 홍범도(洪範圖)가 이끄는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등을 주력으로 한 독립군부대가 독립군 토벌을 위해 간도에 출병한 일본군을 청산리 일대에서 10여 회의 전투 끝에 대파한 전투.
  16.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 - 1920년 만주에서 조직된 독립군 연합부대. 192012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의 주도 아래 대한독립군·대한신민회, 구춘선(具春先)이 회장인 대한국민회, 혼춘(琿春)의 대한국민회ㆍ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ㆍ의군부(義軍府)ㆍ혈성단(血誠團)ㆍ야단(野團)ㆍ대한정의군정사(大韓正義軍政司)의 대표들이 노령(露領) 연해주(沿海州)로 건너가 장기 항일전을 준비하기로 결정하고, 밀산에서 이 단체를 조직하였다. 총재는 서일(徐一), 부총재는 홍범도(洪範圖), 고문은 백순(白純)ㆍ김호익(金虎翼), 외교부장은 최진동(崔振東), 참모부장은 김좌진(金佐鎭), 참모는 이장녕(李章寧)ㆍ나중소(羅仲昭), 군사고문은 지청천(池靑天), 1여단장은 김규식(金奎植), 참모는 박영희(朴寧熙), 2여단장은 안무(安武), 참모는 이단승(李檀承), 2여단 기병대장은 강필립, 중대장에는 김창환(金昌煥)ㆍ오광선(吳光鮮)ㆍ조동식(趙東植) 등을 선임하였다. 자유시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무장해제에 불응한 부대는 연해주 이만(현재의 러시아 연해주 달네레첸스크 지방)에서 만주로 회군하였다. 자유시로 이동한 부대는 통합 과정에서 흑하사변(이칭)을 겪었다. 흑하사변 뒤 자유시에 남은 군대는 고려혁명군으로 재편되었다. 이후 고려혁명군은 이르쿠츠크로 이동하였다.
  17. 고려혁명군(高麗革命軍) - 1923년 만주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 의병장 출신 김규식(金圭植)과 고평(高平)ㆍ이범석(李範奭) 등이 19235월 연길현(延吉縣) 명월구(明月溝)에서 조직하였다. 1920년 봉오동전투ㆍ청산리대첩 후 전 독립군단체가 노령으로 들어갈 때 의군부군(義軍府軍)도 동행하였다. 그러나 자유시참변을 겪은 뒤 소만(蘇滿) 국경을 넘어 옛 활동근거지인 연길현으로 돌아왔다. 이들은 추위와 식량난으로 크게 곤경을 겪고 있었는데, 이 소식이 19223월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알려지자, 임시정부는 노병회(勞兵會) 등과 같이 군자금을 모금, 50원을 지원하였다. 이에 재생의 전기를 마련한 김규식ㆍ고평 등은 청산리대첩의 주역 이범석을 맞아 명월구 요새지에서 400여명을 모아 고려혁명군을 조직하였다. 이는 북간도를 근거로 하여 크게 항일투쟁을 전개하면서 성과를 거두었던 의군부를 재편성한 큰 항일부대였다.
  18. 자유시사변(自由市事變) - 1921년 러시아 자유시(알렉세예프스크)에서 독립군 부대와 러시아 적군이 교전한 사건으로 흑하(黑河)사변이라고도 한다. 자유시는 러시아 제야강(Zeya river)변에 위치한 알렉세예브스크(Alekseyevsk)’ 마을이며, 현재는 스바보드니(Svobodny)’라는 지명으로 불린다. 러시아어로 스바보다(Svoboda)’자유를 뜻하기 때문에 자유시라고 불렸다. 그리고 제야강이 흘러 흑룡강(黑龍江)과 합류하는 지점에 있는 중국의 국경도시 헤이허[黑河]의 지명을 따서 흑하사변(黑河事變)’이라고도 한다.
  19. 경신참변(庚申慘變) - 1920년 일본군이 만주를 침략해 간도에 거주하던 한국인을 대량으로 학살한 사건. 192010월 일본은 일본군의 만주 침략의 구실을 만들기 위해 훈춘사변(琿春事變)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를 빙자하여 간도를 침략한 일본군은 독립군을 소탕한다는 명목 아래 초토화 작전을 감행하였다. 일본군은 한국인 마을을 포위, 습격한 뒤 모든 남자들을 한자리에 모아 놓고 총이나 창으로 학살했고, 부녀자들은 보이는 대로 겁탈하고 살해하였다. 뿐만 아니라, 모든 민가를 소각하고 가축을 약탈함으로써 마을을 폐허로 만들었다. 이와 같은 일본군의 잔인한 만행은 만주에서 선교 활동을 하고 있던 외국인 선교사들에 의해 생생하게 폭로되었다. 일본군의 학살 장면을 목격한 미국인 선교사는 피 젖은 만주 땅이 바로 저주받은 인간사의 한 페이지라고 개탄하고 있으며, 선교사 마틴(Martin, S.H.)과 푸트(Foote)의 수기에서 생생하게 입증하고 있다. , 당시 이와 같은 일본군의 만행을 취재하기 위해 현지에 갔던 동아일보 기자 장덕준(張德俊)을 일본군이 암살한 사건도 일본군의 만행을 은폐하기 위한 수단의 하나였다. 1920109일에서 115일까지 27일간 간도 일대에서 학살된 한국인은 3,469명이었다. 그렇다면 3, 4개월 동안 계속된 일본군의 학살로 희생당한 한국인의 수효는 이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다.
  20.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 - 19228월 만주에서 조직된 독립운동 단체. 봉천성(奉天省) 환인현(桓仁縣) 남구 마권자(馬圈子)에서 열린 남만한족통일회에서 항일독립운동을 보다 효과적으로 펼치기 위해 조직되었다. 1922823일 군정서(軍政署)ㆍ대한독립단(大寒獨立黨)ㆍ한교민단(韓僑民團)ㆍ대한광복군영(大韓光復軍營)ㆍ대한정의군영(大韓正義軍營)ㆍ대한광복군총영(大韓光復軍總營)ㆍ평안북도독판부(平安北道督辦府) 등 이른바 8() 9() 대표 71명이 환인현(桓仁縣) 마권자(馬圈子)에 모여 대한통의부 결성 등 6개항을 결의하였다. 830일 남만한족통일회장(南滿韓族統一會長) 김승만(金承萬) 명의로 결의 내용을 발표하였다. 19232, 환인현 대황구(大荒溝)에서 전덕원(全德元) 등이 이탈해 의군부(義軍府)를 만들고, 유응하(劉應夏)ㆍ여순근(呂淳根) 등은 대한군민부(大韓軍民部)를 만드는 등 분열 되었다가 참의부ㆍ정의부 등에 흡수되어 대한민국임시정부 밑으로 들어갔다. 기관지로 경종보(警鐘報)를 발행하였다.
  21. 김상옥(金相玉, 1889~1923) - 본관은 김해(金海). 별명은 김영진(金永鎭), 아호는 한지(韓志). 서울 출생. 일제강점기 의열단원으로 한당사령부장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그는 1923112일 밤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아비규환의 수라장으로 만들었다. 투탄 당시만 하더라도 의거의 주인공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일본경찰도 정확히 모르고 있었다. 1923122일 새벽 최후 은신처가 일본 경찰에게 탐지되고 말았다. 상해로부터의 서신이 효제동으로 온 것을 전해준 전우진(全宇鎭)이 일본경찰의 수사망에 걸려들어 문초당한 끝에 은신처가 밝혀지게 되었다.그 날 5시반경 경기도 경찰부장 우마노[馬野]가 총지휘관이 되고 보안과장 후지모토[藤本]가 부지휘관이 되어 시내 4대 경찰서에 총비상령이 내렸다. 기마대와 무장경관 수백명이 은신처를 중심으로 효제동 일대를 겹겹이 포위하였다. 김상옥은 단신으로 두 손에 권총을 쥐고 대총격전을 3시간 반 동안에 벌였다. 구리다경부를 비롯한 10여 명을 살상했으나 중과부적이었다. 탄환마저 다하여, 마지막 남은 탄환 한발을 가슴에 겨누고 벽에 기댄 채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자결, 순국하였다.
  22. 장쭤린(張作霖 1875~1928) - 중화민국 국민정부 만저우 지방 베이양 군벌 계파 시대의 봉천군벌이자 정치인. ()가 위팅(雨亭)이기에 장위팅(張雨亭)이라고도 불리었다. 둥베이 3개 성()을 지배하고 친일 관련 성향을 띠었다. 1926213일 중화민국 육군 대원수 진급한 그는 이후 펑위샹 중화민국 국가원수 권한대행 후임을 하여 1927618일에서 1928116일을 기하여 장제스에게 중화민국 국민정부 국가주석 권한대행 직위 인수를 할 때까지 중화민국 국가원수 권한대행을 역임하였으며 그 후 1928116일을 기하여 중화민국 국민정부 대원수 취임한 그는 192861일을 기하여 중화민국 육군 대원수 예편하였고 이틀 후 192863일을 기하여 중화민국 국민정부 대원수 직위를 퇴임하였다. 일부 관동군 참모 중 한 사람이었던 고모토 다이사쿠 대좌가 장쭤린을 제거하기로 하고 베이징에서 텐진으로 돌아오는 장쭤린의 남만주 철도 기차를 폭파시킨다. 장쭤린은 목숨을 간신히 부지하고 봉천의 병원으로 실려왔으나 치료를 받다가 죽었다.
  23. 삼시협정(三矢協定) - 삼시 협정은 1925611한인(韓人)에 대한 취체에 관한 쌍방 협정과 그 해 78일에 체결한 앞의 협정에 따른 시행 세칙을 가리킨다. 쌍방의 협정을 체결할 때 봉천성의 대표는 전성(全省) 경무처장 우진(于珍), 조선 총독부 대표는 경무국장 삼시궁송(三矢宮松)이었다. 시행 세칙의 협정 때 조선 총독부의 대표는 경무과장 국우상겸(國友尙謙)이었다. 일본이 중국의 주권을 인정해 주고, 중국은 일본의 간섭을 배제시킨 채 한인을 직접 탄압한 결과 독립군의 국내 잠입 활동이 급격히 위축되었다. 삼시 협정의 집행으로 만주 지역 민족 운동 단체의 무장 활동이 위축되자, 참의부ㆍ정의부ㆍ신민부의 활동도 만주 지역에서의 활동에 더 집중하는 양상으로 바뀌어 갔다. 이들 3부의 자치 활동이 더욱 강화된 것이다. 이에 따라 독립군의 활동도 만주 지역에 거주하는 한인의 생활을 보호하고, 세금을 징수하는 활동에 더 치중하게 되었다.
  24. 신석우(申錫雨, 1894~1953) - 일제강점기 임시정부 교통총장, 조선일보 사장 언론인. 독립운동가. 호는 우창(于蒼). 한말의 무신인 태휴(泰休)의 아들이다.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전문부를 졸업하였다. 이후 중국 상해로 건너가 여운형(呂運亨)과 함께 고려교민친목회를 조직하고 유인신문(油印新聞)아등(我等)의 소식을 발간하는 한편, 1919년 임시정부 교통총장으로 있었다. 1924년 귀국하여 경영난을 겪고 있던 조선일보를 송병준(宋秉畯)으로부터 85000원에 인수하여 신문의 면목을 일신하였다. 사장에는 이상재(李商在)를 추대하고 자신은 부사장을 맡았다가 1927년 이상재가 별세하자 사장에 취임하였다. 또한, 신간회가 창립될 때에 그 간부직을 맡았고, 아버지를 설득하여 많은 돈을 써가면서 민족지를 키우는 데 노력하였다. 광복 후 1949년부터는 주중국대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25. 권동진(權東鎭, 1861~1947) - 일제강점기 민족대표33인으로 대한협회 부회장, 신간회 부회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19세에 조선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2년 과정을 마치고 육군 초관으로 3년간 근무한 뒤, 함안군수를 1년간 역임하였다. 그 뒤, 거문도첨사로 있을 때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연루된 혐의를 받아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1년간 동경에 체류한 후, 귀국하여 다시 중추원부참의로 2개월간 있었다. 31일 태화관(泰和館)의 독립선언식에 참가해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천도교측 15인 중 1인으로 잡혀,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3년형을 선고받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한 뒤에는 천도교에서 발간하던 잡지 개벽의 편집진으로, 또한 신간회(新幹會)의 부회장으로 적극적인 항일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19263월에는 서울시 종로구 당주동 자택에서 민족주의와 공산주의가 연합해 민족운동을 전개할 것을 논의하였다. 5월에는 공산당과 급진민족주의자들이 국민당을 조직하여 일대 민족독립운동을 계획하였으나 일본 경찰의 사전검거로 실패하였다. 당시 권동진은 공산주의계 인물로 일본 경찰의 주목 대상이었다. 광복 뒤에는 신한민족당 당수·민주의원 등을 역임했다.
  26. 홍명희(洪命憙, 1888~1968) - 호는 가인(可人)ㆍ벽초(碧初). 충청북도 괴산 출생. 어린 시절에 한학을 수학하다가 일본에 유학하여 다이세이중학[大成中學]을 졸업하였다. 경술국치 직후 귀국하여 오산학교(五山學校)ㆍ휘문학교(徽文學校) 등에서 교편을 잡았고, 1920년대 초반에는 한때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지냈다. 시대일보사(時代日報社) 사장으로 재직 중인 1927년에 민족 단일 조직인 신간회(新幹會)의 창립에 관여하여 그 부회장으로 선임되면서 사회운동에 적극 투신하였다. 1930년 신간회 주최 제1차 민중대회사건의 주모자로 잡혀 옥고를 치렀다. 1945년 광복 직후에는 좌익운동에 가담하고,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장이 되기도 하였으나, 곧 바로 월북하여 북한 공산당정권 수립을 도우면서 부수상 등 요직을 거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일제강점기 최대의 장편소설의 하나로 손꼽히는 임꺽정(林巨正)을 발표함으로써 문학사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이 작품은 1928조선일보에 첫 연재를 시작한 뒤 세 차례에 걸쳐 중단되었다가, 광복 직후 미완의 상태로 전 10권이 간행되었다. 조선 중기에 지방의 도둑으로 실록에 그 행적이 단편적으로 기술되기도 한 임꺽정의 이야기를 방대하게 그려내었다.
  27. 신간회(新幹會) - 19272월 민족주의 좌파와 사회주의자들이 연합하여 서울에서 창립한 민족협동전선. 국내 민족유일당운동의 구체적인 좌우합작 모임이다. 1920년대30년대 민족해방운동은 민족주의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의 두 흐름으로 파악될 수 있다. 그런데 두 흐름은 민족운동의 이념, 방법, 주도세력 등에 따라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고 민족주의 좌파와 사회주의자들의 민족협동전선으로 창립된 것이 신간회였다. 19272월부터 19315월까지 존속한 신간회는 서울에 본부를 두고 전국적으로 120150여 개의 지회를 가지고 있었으며 24만 명에 이른 일제하 가장 규모가 컸던 반일사회운동단체였다. 창립 당시부터 좌우익 간의 갈등ㆍ대립으로 분란이 계속되던 신간회는, 1931516일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에서 대의원 77명이 참석한 가운데 해소대회를 열고 해산을 결의, 창립된 지 만 4년 만에 막을 내렸다.
  28. 근우회(勤友會) - 1927년에 조직되었던 독립운동 및 여성운동 단체. 191931운동 직후에 조직되어 활약한 대부분의 항일여성단체들이 일제의 탄압으로 해체되었다. 이후 여성운동은 교육운동, 민족경제진흥운동, 종교계 여성단체를 통한 신앙운동이나 생활향상 계몽운동으로 전개되었다.이와 같은 여성운동이 1924년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아 조선여성동우회가 조직된 뒤부터는 민족주의적 방향과 사회주의적 방향으로 양분되었다. 분열된 국내외의 항일민족운동을 통합해 보다 강력한 민족운동으로 추진하기 위해 19272월 신간회(新幹會)가 조직되었다. 여성계에서도 여성운동의 통합론이 일어나, 마침내 그 해 5월에 근우회가 조직되었다. 일제의 탄압이 강도를 더해가면서, 1928년부터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YWCA) 등을 중심으로 기독교 여성운동을 추진했던 유각경ㆍ김활란ㆍ황에스터ㆍ최은희 등이 근우회에서 퇴진하자 근우회는 사회주의운동가들의 독무대가 되었다. 이는 여성운동의 통합ㆍ통일이라는 당초의 목표에 어긋나는 것으로, 와해의 기미가 싹트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자금난까지 겹쳐 1930년부터 근우회 운동에 대한 자체 비판이 높아지기 시작했으며, 각 지회간의 연계가 점차 무너져갔다. 19312월 주을지회(朱乙支會)에서 처음으로 해체론이 제기된 이래, 부산ㆍ북청ㆍ신의주 등지에서도 논의가 거듭되었다. 당시 근우회 안에서는 해체론이 심각하게 주장되고 있었는데 반해 일반 사회에서는 조직과 기능을 보완해 계속해서 추진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스스로의 역량 부족과 일제의 탄압 등으로 끝내 정식 해산발표도 없이 해체되고 말았다.
  29. 우봉운(禹鳳雲, 1899~?) - 일제강점기 간도애국부인회 회장, 철혈광복단원, 블라디보스크 부인독립단원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경상남도 김해에서 출생하였다. 서울 정신여학교(貞信女學校)를 졸업하고, 국내 및 해외에서 여성교육활동에 종사하였다. 이후 불교를 신앙하게 되어 불교여성운동 및 사회주의 여성운동가로 활약하였다. 광복 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경성시 인민위원 중의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으며, 194819일에는 민족자주연맹 제2차 상무위원회에서 부녀부장으로 선임되었다. 동년 415일 민주독립당 상무집행위원회의 각 부서 개편에서는 부녀위원회의 대표가 되었다. 19488월 황해도 해주에서 개최된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 참가한 대표 30여 명 중의 한 사람이었으며, 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이후 활동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30. 허정숙(許貞淑, 1902~1991) - 일제강점기 근우회 중앙집행위원, 화북조선독립동맹 집행위원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사회주의운동가ㆍ정치인. 함경북도 명천 출신으로 본명은 허정자(許貞子), 이명은 허정숙(許貞琡)ㆍ수가이(秀嘉伊) 이다.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로 활동한 허헌(許憲)의 큰딸로, 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고베神戶신학교에서 수학하고, 1921년 경 중국 상해에서 유학했다. 1925년 아버지 허헌을 따라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가 1927년 귀국하고, 19287월 신간회의 자매단체 근우회(槿友會) 전형위원 및 중앙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192912월 광주학생운동이 서울로까지 확대되자, 근우회 서무부장으로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의 학생시위에 관여하였다가 체포되어 징역 1년을 받고 1932년 출옥했다. 1936년 남편 최창익(崔昌益)과 중국으로 망명하였고 조선민족혁명당에 입당했다. 1938년 민족혁명당을 탈당하고 조선청년전위동맹 결성에 참여했다. 10월 일본군에 우한武漢이 함락되자 중국공산당 근거지인 연안(延安)으로 들어갔다. 1940년 항일군정대학 정치군사과를 졸업했고, 1941년 팔로군(八路軍) 120사 정치지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어 1942년 조선혁명군정학교 교육과장 및 독립동맹 집행위원을 지냈다. 해방 직후인 194512월 경 귀국하고 평양으로 월북하여 북한정부에 참여하였다. 1947년 북조선인민위원회 선전부장, 1948년 북한 문화선전상을 지내고, 한국전쟁 이후에는 1957년 사법상, 1959년 최고재판소장, 1972년 최고인민회의 부의장, 조선민주여성동맹 중앙위원회 서기장, 1983년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비서 등 당ㆍ정부ㆍ입법부 및 통일단체ㆍ여성단체의 요직을 거쳤다.
  31. 광주학생운동(光州學生運動) - 1929년 광주 지역의 학생이 주도하여 일으킨 항일독립만세운동.
  32. 김홍일(金弘壹, 1898~1980) - 본관은 김해(金海). 초명은 홍일(弘日), 호는 일서(逸曙). 별명은 최세평(崔世平), 중국식 이름은 왕웅(王雄왕일서(王逸曙왕부고(王復高). 평안북도 용천 출신. 중국 육군강무학교(陸軍講武學校)를 졸업한 이후 한국독립군에 가담하여 항일활동을 벌였고, 중국군의 요직을 거치기도 했다. 김구의 요청으로 송식표(宋式驫)와 함께 1932년 이봉창(李奉昌)18 일왕저격 및 윤봉길(尹奉吉)429 상해의거용 폭탄을 제작하였다. 19456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참모장이 되었다. 같은 해 12월 중국 동북보안사령장관부(東北保安司令長官部) 고급참모 겸 한교사무처장에 취임하여 광복 당시 만주 일대에 거류하는 한국인 동포의 보호와 본국송환에 진력하였고, 1946년 말에는 미중앙정보단(CIG)의 비밀 업무를 지원하기도 했다. 19475월 중국 국방부ㆍ정치부 전문위원으로 활동하다가 19488월 귀국하였다. 해방 후 귀국해서는 육군사관학교 교장을 맡아 한국군 초기 설립에 공을 세웠고 이후 정치가로도 활동했다. 1961516군사정변으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고문과 군정 외무부장관을 지냈다. 1965년 한일협정을 적극 반대, 박정희(朴正熙)와 결별하고, 1967년 정계에 투신하여 제7대 국회의원이 된 뒤, 1970년 신민당 전당대회의장을 거쳐, 1971년 유진산(柳珍山)이 한때 물러난 뒤에 당수 권한대행을 맡았다. 그 해 신민당 전국구 국회의원이 되었고, 당내로는 김대중(金大中)과 제휴하여 1971년 신민당 당수가 되었으나, 당내 양파가 각각 전당대회를 열어 12당수의 내분을 겪은 뒤, 19729월 당수직을 사임하였다. 박정희의 삼선개헌과 유신체제에 반대하고, 만년에는 광복회 회장을 맡았다. 1980년에 82세로 사망하였다.
  33. 조선어학회사건(朝鮮語學會事件) - 194210월부터 일제가 조선어학회 회원 및 관련 인물을 검거해 재판에 회부한 사건.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후 중국 침략을 목전에 두고 조선 민족에 대한 압박을 한층 더해갔다. 1936년에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을 공포한 후, 1937년에는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 회원을, 1938년에는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 회원을 검거하였다. 또한, 조선민족사상을 꺾고 나아가 조선 민족을 말살하기 위해, 조선어 교육을 단계적으로 폐지하였다. 1941년에는 조선사상범 예방구금령(朝鮮思想犯豫防拘禁令)을 공포하여 독립운동가를 언제든지 검거할 수 있는 길을 터놓았다.이처럼 일제 탄압이 숨막히게 조여들자 조선어학회는 사전의 편찬을 서둘러 19424월에 그 일부를 대동출판사(大東出版社)에 넘겨 인쇄를 하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함흥영생고등여학교(咸興永生高等女學校) 학생 박영옥(朴英玉)이 기차 안에서 친구들과 한국말로 대화하다가 조선인 경찰관인 야스다(安田稔, 安正默)에게 발각되어 취조를 받게 된 사건이 벌어졌다. 일본 경찰은 취조 결과 여학생들에게 민족주의 감화를 준 사람이 서울에서 사전 편찬을 하고 있는 정태진(丁泰鎭)임을 파악하였다. 같은 해 95일에 정태진을 연행, 취조해 조선어학회가 민족주의단체로서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자백을 받아냈다. 이로써 일제는 31운동 후 부활한 한글운동을 폐지하고, 조선민족 노예화에 방해가 되는 단체를 해산시키고 나아가 조선 최고의 지식인들을 모두 검거할 수 있는 꼬투리를 잡게 되었다. 같은 해 101, 첫 번째로 이중화(李重華)ㆍ장지영(張志暎)ㆍ최현배(崔鉉培) 11명이 서울에서 구속되어 다음날 함경남도 홍원으로 압송되었다. 이를 시작으로 하여 잇따라 조선어학회에 관련된 사람이 검거되어, 194341일까지 모두 33명이 검거되었다. 그리고 이 때 증인으로 불려나와 혹독한 취조를 받은 사람도 48명이나 되었다. 사건을 취조한 홍원경찰서에서는 사전 편찬에 직접 가담했거나 재정적 보조를 한 사람들 및 기타 협력한 33명을 모두 치안유지법의 내란죄로 몰았다. 검사에 의해 이극로ㆍ이윤재ㆍ최현배ㆍ이희승ㆍ정인승ㆍ정태진ㆍ김양수ㆍ김도연ㆍ이우식ㆍ이중화ㆍ김법린ㆍ이인ㆍ한징ㆍ정열모ㆍ장지영ㆍ장현식 등 16명은 기소, 12명은 기소유예되었다. 기소자는 예심에 회부되고 나머지는 석방되었다. 기소된 사람은 함흥형무소 미결감에 수감되었다. 같은 해 128일에 이윤재가, 1944222일에는 한징이 옥중에서 사망하고, 장지영·정열모 두 사람이 공소소멸로 석방되어 공판에 넘어간 사람은 12명이었다. 이들에 대한 함흥지방재판소의 재판은 194412월부터 19451월까지 9회에 걸쳐 계속되었다. 이극로 징역 6, 최현배 징역 4, 이희승 징역 26개월, 정인승ㆍ정태진 징역 2, 김법린ㆍ이중화ㆍ이우식ㆍ김양수ㆍ김도연ㆍ이인 징역 2년 집행유예 3, 장현식 무죄가 각각 언도되었다. 이에 집행유예와 무죄선고를 받은 사람은 석방되었다. 실형을 받은 사람 중 정태진은 복역을 마치는 것이 오히려 상고보다 빠르다 하여 복역을 마치고 194571일 출옥하였다. 이극로ㆍ최현배ㆍ이희승ㆍ정인승 4명은 판결에 불복, 바로 상고했으나 같은 해 813일자로 기각되었다. 그러나 이틀 뒤인 815일 조국이 광복되자 817일 풀려나왔다.
  34. 이극로(李克魯, 1893~1978) - 경상남도 의령 출신. 호는 고루. 1920년 중국 상해 동제대학(同濟大學) 예과를 마치고 1927년 독일 베를린대학 철학부를 졸업하였다. 1929조선어사전(뒷날 조선어학회의 조선말큰사전)편찬 집행위원, 1930년 한글맞춤법 제정위원, 1935년 조선어 표준어 사정위원, 1936년 조선어사전 편찬 전임위원 및 조선어학회 간사장을 지냈다. 1942101조선어학회사건으로 검거되어 징역 6년을 선고받고 함흥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45년 광복을 맞아 풀려났다. 1946년 건민회(建民會) 위원장을 지냈고, 19484남북 제정당ㆍ사회단체 연석회의참석차 평양에 갔다가 잔류하여 북한에서 활동하였다. 19489월 북한 제1차내각의 무임소상, 1949년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조국전선) 중앙위원회 의장 및 과학원 후보원사, 1953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1962년 과학원 조선어 및 조선문학 연구소장, 1966년 조국전선 중앙위 의장, 1970년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및 박사, 1972년 양강도 인민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지냈다. 한편, 1966년 이후 본격화한 북한의 언어규범화운동인 문화어운동 사업을 주관하였으며, 논문으로 조선어조 연구등을 남겼다.
  35. 이윤재(李允宰, 1888~1943) - 호는 환산(桓山)ㆍ한뫼. 경상남도 김해 출신. 일제강점기 성웅 이순신, 문예독본, 표준한글사전등을 저술한 학자. 국어학자, 독립운동가, 사학가. 김해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김해합성학교(合成學校)에서 교편을 잡은 뒤, 다시 대구계성학교(啓聖學校)에서 수업하였다. 1913년부터 마산의 창신학교(昌信學校의신여학교(義信女學校)에서 교편을 잡다가 평안북도 영변의 숭덕학교(崇德學校) 교사로 재직 중 31운동에 관련되어 평양 감옥에서 3년간 옥고를 치렀다. 1921년 중국에 건너가 북경대학 사학과에서 수업한 뒤 1924년 귀국하여 정주의 오산학교(五山學校)를 거쳐 협성(協成)ㆍ경신(儆新)ㆍ동덕(同德)ㆍ배재(培材)ㆍ중앙(中央) 등의 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27년 계명구락부(啓明俱樂部)의 조선어사전 편찬위원이 되었고, 민족정신의 보전ㆍ계승을 위한 잡지 한빛을 편집, 발행하였다. 1929년 조선어연구회ㆍ조선어사전편찬위원회의 집행위원, 1930년 한글맞춤법통일안의 제정위원이 되어 국어통일운동의 중진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1931년 연희전문학교에서 강의를 맡았으며, 이해부터 4년간 여름마다 동아일보사·조선일보사 등에서 벌인 하기한글강습회 강연차 지방을 순회하였다. 1932년에는 조선어학회의 기관지 한글의 편집 및 발행 책임을 맡았으며, 1934년에는 진단학회(震檀學會)의 창립에 참여하였다. 이듬해 감리교신학교에서 강의를 맡았으며, 조선어표준어사정위원회의 사정위원이 되고, 1936년 조선어사전편찬위원회의 편찬전임집필위원이 되었다. 1937년 수양동우회사건(修養同友會事件)에 관련되어 서대문 감옥에서 약 1년반 옥고를 치른 뒤, 1939년 대동출판사(大同出版社)에 근무하였다. 1941년 기독신문사 주필로 일하면서 한글보급과 우리말사전 편찬에 주력하다가,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으로 동지들과 함께 홍원경찰서에 붙잡혀 함흥형무소에서 복역 중 옥사하였다. 1947년 유고 표준한글사전(大同文化社, 1953)이 간행되었다. 이는 조선어학회에서 발표한 한글맞춤법통일안과 사정된 조선어표준말모음을 기준삼아 처음으로 엮은 것이다.
  36. 최현배(崔鉉培, 1894~1970) - 일제강점기 우리말본, 한글갈, 조선민족 갱생의 도등을 저술한 학자. 국어학자, 국어운동가. 19264월 연희전문학교(지금의 연세대학교) 교수로 취임하여 19389월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파면당할 때까지 재직하였다. 19415월 연희전문학교에 도서관 직원으로 복직하였으나, 그해 10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사임, 1945년 광복까지 4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19459월부터 19489월까지, 19511월부터 19541월까지 문교부(지금의 교육부) 편수국장에 두 차례 재직하였다. 1954년 연희대학교 교수로 취임하여 문과대학 학장과 부총장을 역임하고 1961년 정년퇴임으로 연세대학교 명예교수로 추대되었다. 19643월부터 2년간 부산 동아대학교 교수로 재직한 일이 있다. 1954년 학술원 회원에 뽑혔고 이어 임명회원ㆍ부회장을 맡았다. 1955년 연희대학교에서 국어학 연구와 그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 밖에 1949년 한글학회 이사장에 취임하여 20년간 계속하여 한글학회를 이끌었으며, 1949년 한글전용촉진회 위원장, 1957년부터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이사·부회장·대표이사 등으로 국어운동의 중심적인 인물로 활동하였다. 이러한 여러 방면에 걸친 활동과 공로로 1955년 제1회 학술원공로상, 1967516민족상 학예부문 본상을 수상하였고, 19703월 사망하자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
  37. 김윤경(金允經, 1894~1969) - 본관은 경주(慶州). 호는 한결. 경기도 광주 출신. 14세 때까지 고향에서 한학을 수학하다가 신학문을 닦기 위해 상경하여 우산학교(牛山學校)에 입학하였으나, 그 뒤 의법학교(懿法學校)로 전학하여 1910년 고등과를 수료하고 다시 청년학원(靑年學院)으로 옮겨 1913년에 졸업했다. 청년학원에서 주시경(周時經)의 한글(국어학)을 교육받고 크게 감화를 받았다. 1913년부터 마산창신학교(昌信學校) 고등과 교사로 있으면서 국어ㆍ역사ㆍ수학을 가르치다가, 1917년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 문과에 들어갔다. 이 때 연희전문학교 학생청년회가 주동이 되어 서울시내 고등보통학교ㆍ전문학교 학생 1,000여명이 조선학생의 친목과 단결을 위해 조직한 조선학생대회(朝鮮學生大會)의 회장을 맡는 등 학생운동에 앞장섰다. 1921년 조선어연구회(朝鮮語硏究會)1922년 수양동맹회(修養同盟會)의 창립회원이 되었다. 1922년부터는 배화여학교(培花女學校) 교사로 있으면서 국어ㆍ역사를 가르쳤다. 이때 학교에서 일본유학비를 받아 동경(東京)의 릿쿄대학(立敎大學) 문학부 사학과(동양사)1929년 졸업했다. 귀국하여 다시 배화여학교에 근무하며, 19311월부터 동광지에 대학졸업논문을 연재하던 중 18회로 휴간, 중단되었다. 그러나 그후 4년여에 걸쳐 이 원고에 국어학연구의 각종 자료를 더하여 조선문자급어학사(朝鮮文字及語學史)를 탈고하였다. 19376월 수양동우회사건으로 종로경찰서에 검거되어, 치안유지법위반이라는 죄명으로 교사직을 사임하고, 졸업생대표 연희전문이사직에서도 해임되었다. 19376월에 투옥되어 이듬해 7월에 보석으로 출옥하였으며, 19381조선문자급어학사가 출판되었다. 수양동우회사건으로 5년간 실직하였다가 1942년 성신가정여학교(誠信家政女學校) 교사가 되었으나, 그해 10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또다시 홍원경찰서(洪原警察署)에 검거되었다. 광복 후 조선어학회 상무간사와 국어부활강사로 활약하는 한편, 연희전문학교 접수위원, 연희전문학교 이사의 일을 맡았고, 그해 10월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취임한 이래 문학부장과 총장(대리)을 역임하였다. 1948년에는 나라말본중등말본을 펴냈고, 1949년에는 조선문자급어학사4대 명저의 하나로 표창받았다. 1952년부터는 문교부 사상지도원 전문위원ㆍ국사편찬위원, 625로 인한 교사복구추진위원, 대한교육심의위원, 교수요목개정심의회 국어위원, 문교부 교과용도서활자개량위원, 연희대학교 대학원장, 국어심의회 위원, 교육용도서편찬심의위원회 위원 등을 지냈다. 1955년에는 학문의 업적과 교육가 및 한글운동가로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연희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학위를 받았고, 학술원회원이 되었다. 1957년에는 고등 나라말본중등 나라말본을 펴냈고, 기독교공로상ㆍ국어공로상을 받았다. 1962년에는 교육임시특례법에 따라 연세대학교를 퇴임하였으나, 국어심의회 위원, 숙명여자대학교대학원과 한양대학교 강사를 역임했고, 학술문화발전공헌공로상과 한글공로상을 받았다. 1963년에는 한양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수로 취임하고, 새로 지은 국어학사를 펴냈으며, 문화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1964년에는 전국국어국문학교수단 이사장의 일을 맡았고, 고희기념으로 한결국어학논집을 펴냈다. 1969년에 사망, 사회장을 지냈다.
  38. 장지영(張志暎, 1887~1976) - 해방 이후 국어입문, 옛글, 향가등을 저술한 학자.국어학자, 언론인. 본관은 인동(仁同). 호는 열운(洌雲). 서울 출신. 1891년부터 가숙(家塾)에서 한문을 수학하다가, 1906년 관립 한성외국어학교(漢城外國語學校) 한어과(漢語科)를 졸업하고 모교에서 부교관으로 근무하였다. 19087월부터 19116월 사이에 주시경(周時經)의 문하(사저)에서 국어학을 연구, 여기서 나라사랑의 정신과 학문의 기초를 다졌다. 19089월 사립 정리사(精理舍, 數理專門)에 입학, 19113월에 졸업하였다. 그뒤 곧 교육계에 종사하기 시작하여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학교(五山學校), 서울의 상동청년학원(尙洞靑年學院), 경신중학교(儆新中學校) 교사로 활동하였다. 1912년경에 유지들과 물산장려회를 조직하여 무명을 손수 짜서 옷을 지어 입는 운동을 벌였으며, 1913년경에는 독립운동단체의 하나인 청년비밀결사대 흰얼모(白英社)’를 조직하여 국내는 물론 상해 임시정부와 연락을 통하여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1919228, 그는 그의 동지 조규수ㆍ김정섭ㆍ신경우ㆍ노대규 등과 교남동 자택에 모여 고종황제의 승하 내막을 폭로하여 국민들의 의분을 불러일으키기로 하고, 조선일보 정치부장 조규수가 국민대회 포고문을 지어 시내 곳곳에 붙여 3·1운동을 측면에서 도왔다. 또한, 1920년 대동단(大同團) 당수 전협(全協)의 부탁으로 의친왕(義親王)을 상해로 모셔가서 왕정을 세우려는 계획을 온 국민에게 알리기 위한 독립선언문을 기초하기도 하였다. 192112, 한글학회의 전신인 조선어연구회를 조직하였다. 192610월부터 19317월 사이에는 조선일보에 근무하면서 문맹퇴치와 한글보급운동을 맹렬히 펴 큰 성과를 올렸다. 19271월 신석우(申錫雨)ㆍ조병옥(趙炳玉)ㆍ안재홍(安在鴻) 등과 신간회(新幹會)’를 조직 활동하였다. 194210, 조선어학회사건으로 홍원과 함흥에서 옥고를 치렀다. 해방 후, 미군정청 문교부 편수국 부국장, 조선어학회 제6대 이사장, 국립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강사, 세종중등국어교사양성소 소장을 지냈다. 19489월 연희대학교 교수로 부임하고,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대우도 겸하여 근무하였다. 195012, 625중 제주도로 피난하여 제주여자고등학교ㆍ제주농업고등학교 강사, 제주대학 설립위원, 제주대학 교수, 제주대학 문학과장을 지내다가, 195211월 연희대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에 복직하였다. 195610월 이후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이사를 지냈다. 19642월 학문의 업적과 한글운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연세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197712월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39. 이희승(李熙昇, 1896~1989) - 해방 이후 국어학개설 , 새고등문법, 국어대사전등을 저술한 학자. 국어국문학자. 본관은 전의(全義). 호는 일석(一石). 경기도 광주 출생. 1903년부터 5년간 사숙에서 한문을 수학하였고, 1908년 이정옥(李貞玉)과 혼인한 다음 곧 상경하여 관립 한성외국어학교 영어부에 입학하였으나, 1910년 경술국치로 이 학교가 폐교되어 3년만에 졸업하였다.이어 19119월까지 경성고등보통학교에서 수학하고 1912년부터 1913년까지 양정의숙(養正義塾)에서 법학을 전공하였다. 1914년 사립 신풍학교(新豊學校) 교원으로 취임하고, 한편으로 1915년 사립 중동학교 야간부에 다녔으며, 이어 1918년 사립 중앙학교 4년을 졸업하였다. 1919년부터 4년 반 동안 경성방직주식회사에 근무하다가 1923년 전문학교 입학 검정 시험에 합격하여, 1925년 연희전문학교 수물과(數物科)를 졸업하고 이어 1927년 경성제국대학 예과를 수료한 다음, 1930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조선어학 및 문학과를 졸업하였다. 같은 해 조선어학회에 입회하여 간사(이사)와 간사장(대표간사) 등을 역임하면서 이 회에서 추진하고 있던 한글맞춤법통일안’(1933년 완성)표준어사정(標準語査定)’(1937년 완성)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한편, 1930년 경성사범학교 교유(敎諭), 1932년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직에 취임하여 국어학 및 국문학을 강의하다가, 1942101일 조선어학회사건으로 검거되어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와 함흥형무소에서 1945817일까지 3년 동안 복역하였다. 광복 후 194512월 새로 개교한 경성대학 법문학부 교수에 취임하고, 19461022일의 학제개편으로 국립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되어 국어학연구의 선구자로서 후진 국어학도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1952년 서울대학교대학원 부원장, 1957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장 등을 역임하고, 1960425315 부정선거 규탄 대학교수단 데모에서는 앞장을 섰다. 1961930일 서울대학교를 정년퇴임함과 동시에 서울대학교로부터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43월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에 피선되고, 1962년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에 피임되었으며, 19638월 동아일보사 사장에 취임하여 2년 동안 군사정권 아래에서의 언론창달에 진력하였다. 19659월 대구대학 대학원장에 피임되어 학계에 복귀한 뒤, 1966년부터 1969년까지 성균관대학교 대학원장을 역임하였으며, 1971년부터 1981년까지 단국대학교 부설 동양학연구소 소장직을 맡아 국학 및 동양학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1957년 학술원공로상, 1960년 서울특별시교육공로상,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1978년 인촌문화상, 1989년 국민훈장 무궁화장 등을 받았다.
  40.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 - 1926년 안창호가 서울에서 조직한 흥사단 계열의 개량주의적 민족운동단체. 19222월 서울에서 조직된 수양동맹회와 19227월 평양에서 조직된 동우구락부가 19261월에 합동하여 결성되었다. 1921년 상해에 있던 이광수(李光洙)가 안창호로부터 흥사단의 한국지부를 조직하라는 사명을 받고 귀국하였다. 그 후 이광수는 김종덕(金鍾德)ㆍ박현환(朴賢煥)ㆍ김윤경(金允經)ㆍ강창기(姜昌基) 11명을 규합하여 19222월 서울에서 청년 남녀의 수양 기관을 표방한 수양동맹회를 결성하였다. 19227월 평양에서는 김동원(金東元)ㆍ김성업(金性業)ㆍ조명식(趙明植)ㆍ김영윤(金永胤)ㆍ김광신(金光信)ㆍ이제학(李濟學)ㆍ김형식(金瀅植) 등 흥사단계 인물들에 의해 동우구락부라는 친목 단체로 합법 위장한 민족 운동 단체가 조직되었다. 두 단체는 같은 흥사단 계열로 19261월 통합, 수양동우회라 하였다.
  41. 백영엽(白永燁, 1892~1973) - 평북 의주(義州) 출생. 1918년 일본 수상 계태랑(桂太郞) 주살모의에 관련되어 1년간 거주 제한 처분을 받고, 중국으로 망명하여 남경 금릉대학(南京金陵大學) 신학부에 입학하였다. 재학 중 중국인 학생들에게 한국 독립의 필요성을 역설하였으며, 1919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상해에서 임시정부 수립을 적극 지원하였다. 동년 9월 군자금 모집 사명을 띠고 입국하여 의주에서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할 임시정부 대표의 여비를 조달하였다. 19206월에는 임시정부 법무차장 안병찬(安秉瓚)이 만주 관전현(寬甸縣)에서 중국 관헌에게 체포되자, 그는 당시 외무총장이던 안창호(安昌浩)와 재무국장 고일청(高一淸)으로부터 외교교섭의 명을 받고 안병찬의 석방을 협의하기도 하였다. 192133일에는 상해에서 손정도(孫貞道) 목사를 중심으로 조직한 대한야소교진정회(大韓耶蘇敎陳情會)에 가입하여 국내외 각 교회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진정서를 발송하였다. 동년 44일 금릉대학을 졸업하고 남경교회에서 일을 보다가 19224월 하얼빈(哈爾賓)으로 왔다. 이곳에서 동년 814일 평남 안주(安州)교회 목사의 직을 맡아 입국 도중 신의주 급행열차 안에서 일경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동년 102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다시 만주 봉천(奉天)으로 건너가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평양으로 돌아왔다. 19318월에는 평양 대동강에서 개최된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 하계대회에 참석하여 이에 가입하고, 19375월까지 동우회 선천지회(宣川支會) 간사로서 민족계몽과 인격 수양을 목적으로 활동하다가 또다시 일경에 체포되었다. 그는 194082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받았으나, 고등법원에 상고하여 무죄로 석방될 때까지 수년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42.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 - 1919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세워졌던 임시정부 성격의 단체. 1917년 러시아에서 ‘2월 혁명이 일어났고 ‘11월 혁명이 일어나 볼셰비키 혁명정부가 들어서자, 러시아는 전국이 적백(赤白)의 싸움으로 혼란하게 되었다. 이에 자극된 한인들은 오영준(오와실리), 유스테판, 김립, 박이반, 채성오, 이한영, 전태국 등 10여 명은 하바로프스크에서 원호인과 여호인 사회주의운동 활동가들이 총망라된 전로한족대표자회를 조직하고 19181월 대표자회의를 소집해 한족중앙총회 조직을 결의하였다. 전로한족대표자회는 19186월 니콜리스크에서 열린 제2차 회의에서 전로한족중앙총회를 발기하였다. 한편, 19181월 이동휘가 하바로프스크에서 박진순(朴鎭淳)을 통해 공산주의 선전요원 그레고리노프와 접촉하고 5월 한인사회당을 결성하였다. 이동휘는 민족주의자로 알려져 있었으나, 어떠한 외세도 독립운동에 이용하려 하던 차에 온갖 유리한 조건을 제공한다는 선전에 혹했던 것이다. 한인사회당은 전로한족회중앙총회와 협력하여 의병을 모집하고, 시베리아에 출동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시베리아 출병으로 러시아령 지역 독립운동은 타격을 받아 다시 침체기에 빠졌다. 이후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고 전후문제를 처리하기 위한 파리강화회의가 개최되는 등 새로운 국제정세가 전개되자 이에 대처하기 위해 전로한족회중앙총회는 1919317(225일이라는 설도 있음)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대한국민의회로 개편되었다. 대한국민의회는 의장에 문창범, 부의장에 김철훈(金喆勳), 서기에 오창환(吳昌煥)을 선출하였으며, 독립을 선포하고 일제가 불응하면 혈전을 포고하겠다는 내용의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43.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 1919년 중국 상하이에서 한국독립운동가들이 수립했던 임시정부. 정부수립일은 1919411. 31운동을 전후로 국내외 7개의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으나, 상하이를 거점으로 19199월 개헌형식으로 통합되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되었다. 상하이에 있던 시기(19191932)에는 국내외동포사회에 통할조직을 확대하면서 외교활동이나 독립전쟁 등을 지도, 통할하는 데 주력하였다.
  44. 국민대회(國民大會)와 한성정부(漢城政府) - 19193월 초 이교헌(李敎憲윤이병(尹履炳윤용주(尹龍周최전구(崔銓九이용규(李容珪김규(金奎) 등이 이규갑(李奎甲)에게 임시정부의 수립을 제의하였다. 이들의 권유로 각 방면의 대표들이 42일 인천 만국공원에 모여 임시정부를 수립, 선포할 것을 결정하였다. 여기에 참석한 사람은 천도교 대표 안상덕(安商德), 예수교 대표 박용희(朴用熙)ㆍ장붕(張鵬)ㆍ이규갑, 유교 대표 김규, 불교 대표 이종욱(李鍾郁) 20명이다. 4월 중순에 안상덕ㆍ현석칠(玄錫七) 등의 발기로 국민대회를 소집하기로 하여 13도 대표를 서울 서린동 봉춘관(逢春館)에 모아 협의하였다. 그 결과 간부 현석칠ㆍ안상덕 등과 학생 김사국(金思國)ㆍ장채극(張彩極)ㆍ김옥결(金玉玦) 등이 서울에서의 국민대회 개최를 준비하기로 하였다. 그 날 임시정부 각원을 선거하기로 하였다. 423일 봉춘관에 국민대회(國民大會)’ 간판을 걸고, 임시정부 선포문과 국민대회 취지서, 결의사항, 각원 명단과 파리강화회의 대표, 그리고 6개조로 된 약법(約法)과 임시정부령 제12호를 발표하였다. 임시정부 선포문에서 ……아민족은 세계만방에 대하여 조선의 독립이오 조선민족의 자유민임을 선언하고 아울러 전민족의사에 기하여 임시정부의 성립되었음을 자에 포고하노라…….” 하였다. 국민대회 취지서에서 “31독립선언의 권위를 존중하고 독립의 기초를 공고히 하여 인간필연의 요구에 보답하게 하기 위해 이에 민족일치의 동작으로써 대소의 단결과 각 지방대표자들로서 분회를 조직해 이를 세계에 선포한다.”고 하였다. 한성정부는 연합통신(UP)에 보도되었기 때문에 국제적으로 더욱 선포 효과가 있었다. 이것은 이 정부가 서울에서, 그것도 국민대회라는 국민적 절차에 의해 조직되었다는 점과 더불어 뒷날 여러 정부의 통합과정에서 정통성을 가지게 되는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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