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18일 목요일

[범용기 제4권] (108) 독립을 향한 선렬들의 가시밭 행군 - 8ㆍ15 해방과 좌익(건준)

815 해방과 좌익

- 건준 -

 

김일성은 815 해방 때까지도 안도현에 숨어 게릴라강화에 주력했다고 한다.

815 해방의 주역은 미국과 소련이었다. 이북이나 이남을 막론하고 우리 민족의 참여는 도외시되거나 주변적인 것이었다.

어쨌든, 패전 일본은 정권은 송진우[1]에게 인수시키려고 교섭했으나 송진우는 연합군 진주와 대한민국임시정부 입국까지는 행정권 인수를 유예한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총독부는 여운형에게 교섭했다. 여운형은 아래와 같은 조건부로 인수를 승낙했다.

 

(1) 전국 정치범 경제범을 즉시 석방하라.

(2) 8~10월까지의 3개월 식량을 확보하라.

(3) 치안유지와 건국운동에 대하여 절대 간섭하지 말라.

(4) 학생과 청년을 조직 훈련하는 일에 절대 간섭하지 말라.

(5) 노동자 농민을 건국사업에 조직 동원하는 것을 절대 간섭하지 말라.

 

이제 아무 권한도 없이 창황하게 쫓겨나는 일본총독부에 이런 따위 요구 조항을 제출하여 동의를 구한다는 그 자체가 쑥스럽다. “너희는 죽지 않으려거든 하루 속히 도망칠 궁리나 해라! 그렇잖으면 민중의 보복으로 섬멸된대도 우리 책임은 아니다. 너희 정부 책임일 것뿐이다.” 해뒀더라면 통쾌할 뻔했다.

어쨌든 건준[2]1944810일에 여운형이 조직한 비밀결사대인 건국동맹[3]을 모체로 하고, 장안파 공산주의자인 이영[4], 최익한[5], 강진 등과 안재홍 주변에 모인 진보파 민족주의자들을 결속하여 건국준비위원회’(약칭 건준)를 조직했다. 위원장에 여운형, 부위원장에 안재홍[6], 총무부장에 최근우[7], 조직부장에 정백[8] 등이 선임됐다.

1945828일에 선언서를 발표했다. 그 요지는 이 모임은 국가건설준비기관으로 과도기의 치안을 자주적으로 유지하면서 신정권 확립을 위한 산파역을 담당한다는 것이었다.

건준창립초기부터 박헌영을 중심한 코뮤니스트그룹’(‘콩구루라고 약칭)은 교묘하게 건준에 침두하여 암약했다. 그래서 일부지방을 제외하고는 건준은 전적으로 사회주의정당이라는 인상을 남기게 됐다. 교조주의 사회주의나 극좌 친소파는 아니었으나 건준은 그들에게 말려들었달 수 있겠다. 부위원장은 허헌[9]이었다. ‘콩구루미제를 비난하면서 인민대중을 미군 총구멍 앞에 몰아넣는 극좌로 달렸다. 안재홍은 건준에서 탈퇴했다.

 

1950720일에 발표한 한국의 위기에 대처하는 미국의 정책이라는 한국백서에 의하면 미군의 최전선 지역은 오끼나와라고 했다. 그런데 소련군은 813에 벌써 북조선의 웅기를 점령하고, 194588일에는 일본에 선전을 포고하고 조선에 진군했다. 그래서 813에 웅기항을 점령, 19일에 평양을, 22일에 개성, 해주, 원산 등지를 25일에 함흥을 점령했다. 이 사실을 보아 맥아더사령부의 38도선에 대한 사전 밀약을 계산에 넣지 않을 수 없다. 말없이 수수방관했기 때문이다.


[각주]

  1. 송진우(宋鎭禹, 1887~1945) - 일제강점기 동아일보사 사장, 한국민주당 수석총무 등을 역임한 언론인. 정치인. 교육자. 독립운동가. 본관은 신평(新平). 호는 고하(古下). 어렸을때 이름은 옥윤(玉潤). 전라남도 담양 출생. 190415세 때 정읍의 유씨(柳氏)와 혼인하였고, 2년 뒤에 담양 창평의 영학숙(英學塾)에 들어가 신학문을 배우기 시작하였는데, 이 때 김성수(金性洙)를 알게 되었다. 1907년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세이소쿠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와 긴조중학교[錦城中學校]를 거쳐 1910년에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에 입학하였으나 일제강점에 충격을 받고 귀국하였다가 이듬해 다시 동경으로 건너가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과에 입학하였다(1915년 졸업). 1916년에 김성수가 인수한 중앙학교(中央學校) 교감이 되었으며 이어 교장에 취임하였다. 19193·1운동으로 옥고를 치렀다. 1921년 동아일보사가 주식회사로 되면서 김성수의 뒤를 이어 3대 사장에 취임하였다. 이로부터 1940년 강제 폐간될 때까지 사장 또는 고문ㆍ주필 등으로 동아일보와 운명을 같이하였다. 19368월에는 베를린올림픽대회 마라톤우승자 손기정(孫基禎)의 운동복 가슴에 새겨진 일장기(日章旗)를 지워버린 사진을 신문에 게재한 사건으로 동아일보가 제4차 무기정간을 당하자 총독부의 압력으로 11월에 사장을 사임하였다. 1945811일 일본총독부측과 해방 후 치안권 위임 등을 제안 받았으나 그의 정세 판단에 따라 거부하였고, 이후 조선총독부는 여운형과 접촉하였다. 광복이 되자 194597일 국민대회준비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으로 취임하였다. 김성수, 김병로, 원세훈(元世勳), 장덕수(張德秀), 서상일(徐相日) 916일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이 결성되자 중앙집행위원회 수석총무에 추대되고, 121동아일보가 복간되어 제8대 사장에 취임하였다. 1228일에는 신탁통치문제로 아놀드(Arnold, A. V.) 미군정장관과 회담을 통하여 반탁시위의 정당성을 강조하였으며, 29일 밤에는 경교장(京橋莊)에서 임시정부요인들과 회담하였다. 미군정청과는 충돌을 피하고 국민운동으로 반탁에 대한 신중론을 피력하고 자택으로 돌아온 뒤 다음날 30일 상오 6시 한현우(韓賢宇) 6명의 습격을 받고 서울특별시 종로구 원서동 74번지 자택에서 죽었다.
  2. 조선건국준비위원회(朝鮮建國準備委員會) - 1945년 해방과 함께 조직된 최초의 건국준비단체. 약칭 건준(建準)’. 여운형은 일본의 항복과 동시에 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를 발족시켰고, 816일 오후 1시 서울의 휘문중학교 교정에서 엔도와의 회담경과 보고연설회를 개최하였다. 건준 부위원장 안재홍(安在鴻)은 한ㆍ일 두 민족의 자주호양을 요망하는 담화를 방송하면서, 경위대 편성을 넘어 정규병의 무장대를 편성하여 질서를 도모할 것과, 식량정책을 넘어 경제상 통화와 물가에 대한 신정책을 수립하고 근본적인 정치운영 대책을 발표하겠다고 하였다. 이들은 서울 풍문여자중학교에 사무소를 두고 건국준비사업 선전공작과 치안활동을 개시하였다. 하지만 민족주의계열 일부 및 공산주의 계열 내부에서 건준의 조직상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우여곡절을 겪은 후에, 건국준비위원회는 97일 해체되었고, 911, 주석에 이승만, 부주석에는 여운형, 총리에는 허헌이 각각 추대, 임명되었으며, 914일 인공중앙위원회에서 인공의 정부 부서 및 정강, 시정 방침 등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여운형은 972차 테러를 당하였고, 상해임시정부의 환국을 기다리던 송진우ㆍ김성수ㆍ장덕수 등은 임정봉대론을 주장하며 이들 조각을 인정하지 않았고, 미군정은 1010일 조선인민공화국을 부인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또한 환국한 이승만도 주석 취임을 거절하는 성명을 발표함으로써 자연적으로 해체되었다.
  3. 건국동맹(建國同盟) - 1945년 광복 직전에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 일본의 패전이 거의 확실해지던 무렵(1944810) 여운형(呂運亨)ㆍ조동호(趙東祜)ㆍ현우현(玄又玄)ㆍ황운(黃雲)ㆍ이석구(李錫玖)ㆍ김진우(金振宇)ㆍ이수목(李秀穆) 등이 주축이 되어 일본의 패망과 조국광복에 대비하기 위하여 국내에서 조직한 비밀단체였다.
  4. 이영(李英, 1889~1960) - 일제강점기 31운동, 북청적색농민조합사건과 관련된 독립운동가. 사회주의운동가. 188941일 함경남도 북청군 출생으로, 이칭은 이청농(李靑儂), 청인농(靑人農)이다. 경성의 사립 오성학교(五星學校)를 졸업한 뒤 중국 남경(南京)의 강녕제일실업학교(江寧第一實業學校)를 졸업했다. 재학 중 조선광복회(朝鮮光復會) 결성에 참여했고, 1913년 경학사(耕學社) 산하 무관학교인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졸업했다. 이후 통화현(通化縣) 동화학교(東華學校) 교사로 근무하다가 1917년 대황구(大荒區) 북일중학(北一中學)으로 옮겨 영어교사로 근무했다. 귀국 후 1923년 고려공산동맹 결성에 참여하여 사회주의 운동을 펼쳤으며, 1928년부터 1932년까지 평양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출옥 후 19331북청적색농민조합 사건에 연루되어 다시 검거되었다. 1945년 해방 직후 조선공산당(장안파) 결성에 참여했고, 96일 전국인민대표자대회에서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고문이 되었다. 그해 11월 박헌영이 중심이 된 조선공산당(재건파)에 합류했으며, 19462월 민족통일전선조직인 민주주의민족전선 상임위원이 되었다. 그해 8월 미군정 경찰에 체포되었다. 1947년까지 여운형과 함께 활동하다가 1948년 평양에서 개최된 남북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연석회의에 근로인민당을 대표하여 참석하였으며, 195312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의장이 되었다. 19569월 최고인민회의 대표단장으로서 소련을 방문했다. 195712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상무위원 및 의장으로 재선되었으며, 1959년 해임되었다. 1960813일 사망했으며, 북한의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5. 최익한(崔益翰, 1897-?) - 호는 창해(滄海). 1897년 경상북도 울진 출생. 일본 유학 중 일월회와 조선공산당 일본부에서 활동했다. 사회주의운동가이자 역사학자인 이청원(李淸源)은 그의 사위이다. 31운동의 영향을 받아 항일운동에 가담하였고, 임시정부의 군자금 모금원으로 활약하였다. 19198월 영주군에서 1,600원을 모금하여 보낸 사건으로 1921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4년형을 선고받았으나 감형되어 1924년 석방되었다. 그 뒤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정경학부를 다니면서 사회주의사상을 받아들였다. 귀국 후 조선공산당 활동을 하다가 19282월에 잡혀 징역 6년을 선고받았다. 19327월 대전형무소로 이송도중 대전역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여 징역 1년이 추가되어 7년간 복역하였다. 193512월 출옥하였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ㆍ조선인민공화국의 간부로 지명되었고, 조선공산당에 입당한 뒤(1945.9.) 박헌영(朴憲永) 일파의 노선에 반대하는 사회노동당(1946.11.)ㆍ근로인민당(1947.5.) 창당에 관여하였다. 1948년 남북협상을 계기로 월북하였다. 월북한 뒤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을 지냈지만, 정치적인 활동보다는 학문연구에 더욱 몰두한 것 같다. 력사제문제(19491950)력사과학(1955) 등에 실학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는 한편, 김일성대학(金日成大學)에서 강의도 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 뒤의 소식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6. 안재홍(安在鴻, 1891~1965) - 본관은 순흥(順興). 호는 민세(民世). 경기도 평택 출신. 1907년에 황성기독교청년회(皇城基督敎靑年會) 중학부에 들어갔다. 이때 이상재(李商在)ㆍ남궁억(南宮檍)ㆍ윤치호(尹致昊) 등과 교분을 가졌다. 1910년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조선인기독교청년회에 계속 관여하여, 조선인유학생학우회를 조직, 활동하면서 1914년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정경학부를 졸업하였다. 1915년 귀국하여 주로 언론계에 종사하다가, 1916년 상해로 망명하여, 이회영(李會榮)ㆍ신채호(申采浩) 등이 조직한 동제사(同濟社)에서 활약하였다. 그 뒤 귀국하여 1915년부터 1917년까지 중앙고등보통학교 교감직을 역임하고, 그 해부터 조선 중앙기독교청년회 교육부 간사를 지냈다. 1919년 동경유학생회에서 항일운동에 참여하는 한편, 비밀결사인 대한민국청년외교단에 가담하여 상해 임시정부의 연통부(聯統府) 역할을 수행하다가 일본경찰에 붙잡혀 3년간 옥고를 치렀다. 1937~1944년 틈나는 대로 평택군 향리의 도릉산방(桃陵山房)에서 우리나라 상고사와 조선철학 연구에 정진하였다. 815광복과 동시에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부위원장이 되었다. 그러나 이 위원회가 공산주의자들에게 좌우되자, 같은 해 9월 독자적으로 국민당(國民黨)을 결성, 당수가 되었다. 그 뒤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중앙위원ㆍ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활동하였고, 19451023일에 열린 독립촉성중앙협의회 결성대회에 참석하여, 이승만을 회장으로 추대하였다. 1947년 과도입법의원 의원이 되고, 미군정청 민정장관(民政長官)이 되어 한인체계에 의한 행정기반을 굳혔다. 정부수립 후 평택군에서 무소속으로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1950921일 납북되어 196531일 죽은 것으로 전해진다.
  7. 최근우(崔謹愚) -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의정원의원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경기도 개성출신. 일본 동경상과대학을 졸업하였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종식을 계기로 재동경유학생을 규합하여 조선청년독립단(朝鮮靑年獨立團)을 결성, 독립시위운동을 계획하였다. 19192월초 국내의 민족지도자와 연락하기 위하여 일시 귀국하였는데 이때 동경(東京)에서 28독립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날 발표된 독립선언서에 대표 11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다. 같은 해 4월 상해(上海)로 망명,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에 의정원의원으로 참여하였으며, 11월 여운형(呂運亨)이 일본으로 갈 때 수행원으로 따라가서 한국의 절대독립을 주장하였다. 그 뒤 독일 베를린대학에 유학하였으며 이 대학을 거쳐 파리에서 공부하였다. 1928년 귀국, 사회운동에 참여하였다. 1945년 광복을 맞이하자 여운형과 같이 건국준비위원회(建國準備委員會)에 참여, 총무부 업무를 담당하였으며, 같은 해 9월 조선인민공화국(朝鮮人民共和國) 중앙인민위원회 후보위원으로, 그리고 외무부장 대리로 선임되었고, 그 뒤 월북하였다.
  8. 정백(鄭栢, 1899~1950) - 본명은 정지현(鄭志鉉), 이명은 적소생(赤笑生). 1899년 강원도 철원 출신에서 태어났다. 서울양정고보를 졸업하였다. 19238월 사회주의 사상단체 민중사 결성에 참여하였다. 또한 1923년 초 설치된 고려공산동맹의 만주 지부인 간도총국의 주요 구성원 가운데 1인이었다. 1928년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고 1930년 출옥 후 상해에서 공산주의 운동에 종사하였다. 해방 이후 19475월 근로인민당 결성에 참여하여 중앙위원, 미소공동위원회 대책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8월 미군정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1948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였고, 8월 해주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496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에 가입하였다. 10월 남한에서 통일전선 공작을 확대하기 위해 서울로 잠입하였다가 11월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12월 기자회견을 통해 전향 성명을 발표하고, 이 후 전향자들로 구성된 국민보도연맹(國民保導聯盟)의 명예 간사장이 되었다. 1950625전쟁 당시 북한 정치보위부에 체포되어 총살당하였다.
  9. 허헌(許憲, 1884~1951) - 일제강점기 노동자, 빈민층 등을 위한 재판에 변호사로 활동한 법조인. 변호사, 독립운동가, 정치가. 함경북도 명천 출신으로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하여 메이지대학明治大學법과를 졸업하고 변호사가 되었다. 귀국 후 사회운동가로서 주로 민간 독립운동단체와 연관을 맺었다. 사상적으로 좌익의 경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우파와 교분이 깊어 중도좌파의 성격을 보여주었다. 1927년 보성전문학교 교장을 거쳐, 1945년 해방 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가담하여 부위원장이 되어, 여운형과 손잡고 진보적 정권을 수립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박헌영(朴憲永)의 조선공산당 재건파와는 직접 연계하지 않았다. 19462월 조선공산당과 그 밖의 중요한 좌익단체들이 참여하여 조직된 이른바 남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의 수석의장이 되었으며, 194611월 남조선노동당 위원장이 되었다. 그의 월북일자는 자세하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19488월 남로당의 대표로 제1기 북한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일했음을 미루어볼 때, 대체로 1947년경에 입북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때 그는 북한에서 박헌영계로 활동하기보다는 오히려 김일성(金日成)의 권력 장악을 지지하는 입장을 보였다. 19488월 북한의 최고인민회의 의장, 10월 김일성대학 총장을 거쳐 19496월부터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의장이 되었다. 625전쟁 중인 19518월에 병사하였다. 북한에서 여성정치가로서 활약한 허정숙(許貞淑)이 그의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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