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18일 목요일

[범용기 제4권] (114) 독립을 향한 선렬들의 가시밭 행군 - 김일성 등장

김일성 등장

 

소련은 미소공동위원회가 삼상회담에서 합의된 대로 시행되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미, 소 공동작업에 체념하고, 미군의 남한주둔을 반대하였으나 미국은 그 제안을 일소에 붙였다. 소련은 철군하기 전에 항일유격전에 이름났다는 김일성[1]을 등장시켰다. 그는 공산주의자면서 민족주의자였다고 한다.

그는 무력투쟁으로 일본군을 못살게 군 경험을 살려서 자기 나름대로의 국토계획, 군사훈련, 노동정당, 특히 정보교육과 첩보대 강화 등등을 추진시켰다. 그는 종교아편설을 신봉하여 자기 관내에서 모든 종교를 일소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구세주로 신봉하게 했다. ‘폐쇄사회의 우민 정책으로 국민을 조종한다. ‘철저한 독재자가 됐다.


[각주]

  1. 김일성(金日成, 1912~1994) - 본명은 김성주(金成柱). 아버지 김형직(金亨稷)과 어머니 강반석(康盤石)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보통학교인 창덕학교(彰德學校)를 거쳐 1926년 부모가 있는 만주로 건너가 길림(吉林)에 있는 육문(毓文)중학에 입학하였다. 북한 측 주장에 따르면 재학중에 타도제국주의동맹[이종락이 만들었다는 반론이 있음]ㆍ반제청년동맹ㆍ공산주의청년동맹 등을 조직하고 1929년에는 만주지구 공산주의청년동맹 서기로 활동, 같은 해 10월 일본 관헌에 체포되어 길림 감옥에서 6개월간 복역하였다. 19324월에 항일유격대를 조직하여 장백산맥과 송화강 유역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고, 1936년에 중국공산당 지도하에 있는 항일유격부대와 연합하여 동북항일연군으로 개편, 12군의 지휘간부로 활동하였다. 1936년에는 통일전선 조직이며 지하혁명 조직인 조국광복회(祖國光復會)를 조직하고 ‘10대 강령을 발표, 국내에 광복회 지하조직망을 구축하는 공작을 전개하였으며, 19376월 국내조직과 연계하여 압록강 상류인 혜산진의 보천보(普天堡)를 습격하였다. 19458월 소련군의 진격과 함께 대원들을 인솔하고 원산으로 상륙하였다. 이렇게 입북한 김일성을 중심으로 하는 항일유격대들은 북한 권력의 핵심세력으로, 그리고 김일성은 처음부터 당과 국가, 군의 수위(首位)에 있으면서 사회주의혁명과 건설을 주도하였다. 19464월 김일성은 기존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북조선공산당으로 창당해 조선공산당 중앙(서울 박헌영)과의 관계에서 벗어났다. 19468월 북조선공산당은 북측 신민당(이칭)과 합당하여 대중정당인 북조선노동당으로 당명을 바꾸고, 같은 해 말에 역사상 처음으로 선거가 실시되어 19472월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프롤레타리아독재정권인 북조선인민위원회가 수립되었다. 19537월 휴전이 성립되고 동 협정의 당사자로서 서명을 하였으며, 다음날인 28일에는 북한에서 최고의 영예인 영웅칭호를 받았다. 휴전 후부터는 전후복구 건설과 함께 농업집단화와 개인상공업의 사회주의화 등 사회주의 개혁이 본격화되었는데 19564월에 개최된 3차 당대회에서 당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196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는 수령의 유일적 지도체제로 발전하게 되는데, 여기서 말하는 수령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체제의 중심, 통일과 단결의 중심을 의미한다. 197212월에 채택한 조선사회주의헌법은 김일성을 국가주석으로 추대함으로써 수령중심의 권력체제를 확립, 모든 권력이 주석인 김일성에게 집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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