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8일 월요일

[범용기 제4권] (2) 서장 - 글을 쓴다는 것

글을 쓴다는 것

 

해방 후 얼마 안되어 친일문학이란 책이 출판되었다. 크기와 부피가 웹스터 떡슈내리[1]만큼이나 한, 거대한 몸집이다. 거기에 일제시대에 친일한 분들의 행동기록, 단체, 주동자, 개인으로서의 회원명단 등등이 적혀 있는가 하면, 이름난 문인들의 친일작품까지 샅샅이 폭로된다. 그것은 쓰여진 그대로였고 이미 공개된 것이니만큼 어느 누구도 항의할 여지가 없었던 것 같다. 사실은 사실이지만 왜 이제 와서 그런 것을 들먹이느냐고 속으로 불평하는 명사[2]들도 없지 않았다지만, 명예훼손죄로 고소한 분이 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그중에서도 어느 문호(?)천황찬가란 일문 시는 드물게 보는 명작이었다.

국내 민족운동의 거물로는 이상재[3] 영감, 윤치호[4] 선생, 최린[5] 등등이 꼽히는 것이었다. 이상재 영감은 지사다운 마감맺히를 남겼지만 윤치호 선생은 비극을 남겼다. 국민복[6] 차림으로 남산신궁[7]에 오르내리시고 귀족원[8] 의원으로 일본국회에 드나드셨다. 그러다가 급작스레 해방되어 상해 임시정부 요인들이 입국하고 보니 그 옛 친구들을 만나려니 부끄럽고 안만나려니 어색하고 양심은 끊임없이 불안하고 그래서 결국에는 개성에서 자결하셨다는 풍문이었다. 그 밖에도 그 동안에 변질된 분들이 수두룩했다. 그런 중에서 도산 안창호 선생만은 서대문 감옥에서 옥사나 다름없는 마감날을 물려 주셨으니 두고두고 민족의 선생이심에 틀림없겠다.

강요된 행동, 입만으로의 쎄리프도 문제에 오르거든 하물며 제 손으로 쓰고 인쇄물로 공개된 글이 숨겨질 리가 있겠는가. “숨겨진 것이 드러나지 않음이 없고 작은 것이 나타나지 않음이 없다”(莫現乎隱莫顯乎微)[9]는 옛 어른의 말씀이 돋보인다.

우리가 이제와서 구태여 이완용[10]을 들먹일 필요도 없다. 그의 후예는 얼마든지 있다. 실종된 지사, 카멜레온의 얼굴들이 거릿바닥에 전시품처럼 너더분하다.[11]

나도 글을 써냈다는 축에 들지 못하지만, 따지고 보면 빽넘버와 함께 휴지통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도 많을 것 같으니 그런 은 글이랄 수 없겠다. 그러면서도 고스란히 도서관 구석에 남아 천년만년 나를 대변하거나 나를 나무랄 것도 사실이다. 그 경우에 내 을 속량[12]할 장본인은 보다도 나 자신의 삶과 죽음이 아니겠는가?


[각주]

  1. 웹스터 사전(Webster Dictionary) - 19세기 초 노아 웹스터에 의해 편집된 사전들, 혹은 노아 웹스터의 참여와 관계없이 웹스터의 이름을 채택한 수많은 사전들을 말한다. “웹스터는 미국에서 영어 사전의 상표가 되었었고 영어 사전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다.
  2. 명사(名士) - 이름이 널리 알려진 사람
  3. 이상재(李商在, 1851~1927) -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계호(季皜), 호는 월남(月南). 충청남도 서천 출신. 아버지는 이희택(李羲宅)이며, 어머니는 밀양박씨이다. 1967년 과거에 낙방한 후, 1880년까지 당시 승지였던 박정양의 집에서 개인 비서일을 보았다. 1881년 박정양의 추천으로 신사유람단에 합류하여 일본에 가서 개화된 일본을 보고 돌아왔다. 이후 1896년 서재필, 윤치호 등과 독립협회를 조직하였고 만민공동회 의장을 맡기도 하였다. 1898년 독립협회가 해산되고 초야에 묻혔다가 19026월 국체개혁을 음모하였다는 개혁당사건에 연루되어 구금되었다가 1904년에 2월 석방되었다(이 당시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고 한다). 국권이 빼앗긴 이후 YMCA 총무에 취임하여 사멸 직전의 청년회를 사수하였다. 191931운동에 연루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렀으며, 1922년 신흥우 등 YMCA대표단을 인솔하여 북경에서 열린 세계학생기독교청년연맹에 참석하여 한국YMCA 창설에 기여하였다. 1922년 조선교육협회를 창설하여 회장에 취임하였고, 조선민립대학기성회를 조직하여 회장이 되었다. 1924년 조선일보사 사장, 1925년 제1회 전국기자대회 의장으로 한국 언론의 진작 및 단합에 크게 기여하였다. 1927년 민족주의진영과 사회주의진영이 연합하여 신간회를 조직할 때, 창립회장으로 추대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였다.
  4. 윤치호(尹致昊, 1866~1945) - 대한제국기 중추원의관, 한성부 판윤 등을 역임한 관료. 정치인, 친일반민족행위자.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이자 정치인인 윤보선(尹潽善)5촌 당숙이다.
  5. 최린(崔麟, 1878~1958) - 1878년 함경도 함흥 출생. 본관은 해주(海州), 호는 고우(故友), 도호(道號)는 여암(如庵). 일제강점기에 31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에 포함되었으며, 보성학교 교장(1911), 천도교 도령(1929), 중추원 참의(1934~1938, 1941~1945), 매일신보사 사장(1938~1941) 등을 지냈다. 1936조선인 징병제 요망운동의 발기인으로 참여해 조선에 징병제 실시를 촉구했다. 해방 후 19491월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세 차례 공판을 받았고 그해 4월에 보석으로 풀려났다. 1950년 한국전쟁 중 납북되어 195812월 평안북도 선천에서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6. 국민복 1940112, 일본 제국 정부에서 쇼와 천황의 칙령 형식을 빌려 공포한 국민복령”(쇼와 15년 칙령 제725)에 따라 정해진 일본 제국 내 남성을 위한 표준 제복이었다. “국민복령은 전시의 물자 통제령 하에 있던 국민의 의복 생활을 간소ㆍ획일화하여 효율성을 도모하기 위해 육군성의 주도로 만드러졌다.
  7. 남산에 있던 조선신궁(朝鮮神宮)은 일제 강점기에 경성부의 남산에 세워졌던 신토의 신사이다. 1925년 당시에는 여의도 면적의 두 배에 가까운 43만 제곱미터의 대지 위에 15개의 건물이 있었다. 태평양 전쟁 종전 이튿날인 1945816일에 일본인들은 스스로 하늘로 돌려보냄을 의미하는 승신식을 연 뒤 해체작업을 벌였고, 107일에 남은 시설을 소각하였다. 이후 조선신궁 자리에는 남산공원이 조성되었고 안중근을 기념하는 안중근의사기념관이 건립되었다.
  8. 귀족원(貴族院) - 일본제국 헌법에 따라 설치되어 중의원과 함께 입법부(제국의회)를 구성한 기관. 귀족원령(1889년 칙령 11)이 정하는 바에 따라 왕족ㆍ화족(작위를 갖고 있는 사람과 그 가족)ㆍ칙임(덴노의 명으로 임명) 의원으로 구성되었다. 1947년에 폐지되었다.
  9. 중용1장에 나오는 말. “莫見乎隱이며 莫顯乎微君子愼其獨也니라”(숨겨진 것보다 더 잘 드러나는 것은 없으며, 작은 것보다 더 잘 나타나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홀로 있을 때 삼가는 것이다).
  10. 이완용(李完用, 1858~1926) - 본관은 우봉(牛峯), 자는 경덕(敬德), 호는 일당(一堂). 1958년 경기도 광주에서 가난한 선비 이호석의 아들로 태어났다. 11세 때 판중추부사 이호준에게 입양되었고, 13세 때 명문가문인 조병익의 딸과 혼인하였다. 25세 때 증광별시에 급제하여 관계로 진출하였다. 민비의 총애를 입고 수구파의 한 사람으로 개화파를 정적으로 삼았다. 구한말 미국과의 교류가 긴요해지고 있음을 간파하고 1887년 육영공원에 입학하여 영어를 비롯한 근대식 교육을 받았다. 1887년 알렌의 인도로 미국으로 건너가 1년간 체류하였다. 귀국 이후 대미외교의 1인자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895년 친미 친러 정책을 중심으로 하는 박정양 내각이 성립되자 학부대신으로 임명되어 알렌의 이권 획득 요구에 적극 협조하였다. 1896년 알렌의 후원하에 이범진 등 친러파와 공모하여 아관파천을 성공시키는데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18967월부터 1898년 초반까지 독립협회에서 활동하였으나 각종 이권을 열강에게 넘겨진 책임으로 제명처분되었다. 1905년 러일전쟁 이후 일본이 승리하자 철저한 친일파로 변신하였으며, 이토 히로부미가 한국의 외교권을 접수하기 위해 조약 체결을 강요하자 이에 적극적으로 찬성하였다. ‘을사5가운데 한 명으로 이후 이토 히로부미의 절대적 신임을 받으며 이토 히로부미를 영원한 스승으로 떠받들었다. 1907년 정미7조약 체결을 주도하여 정미7가운데 한명으로 지탄을 받기도 했다. 190912월 벨기에 황제 추도식에서 이재명의 피습을 받아 치명상을 입었으나 운좋게 살아났다. 191083대 통감으로 부임한 데라우치와 한일병합조약체결 협상을 벌이고, 동년 822일 어전회의에서 순종 황제를 압박하여 합병조칙을 받아내면서 경술91인으로 불리게 되었다. 1910년 일본 정부로부터 합병에 관한 공로로 백작의 작위를 받았고, 1920년 후작으로 올라갔다. 191931운동이 일어나자 매일신보에 경고문을 게재하여 만세운동을 망동이라 비난하고 저항운동을 중지할 것을 촉구하였다. 1926년 이재명 의사의 칼에 폐를 다친 후유증으로 앓던 해수병이 악화하여 사망하여 전라북도 익산에 묻혔으며, 정치행적과는 달리 당대의 명필로 알려져있다.
  11. 너더분하다 뒤섞여 갈피를 잡을 수 없이 어수선하다. 듣기 싫고 번거롭게 길다.
  12. 속량 몸값을 받고 종을 놓아주어 양민이 되게 함. 남의 근심과 고난을 대신하여 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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