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17일 수요일

[범용기 제4권] (90) 野花園餘錄(야화원여록) - 제야의 종

제야의 종

 

지금도 그런지 모르지만 육칠년 전만 해도 서울의 제야는 자못 낭만적이었다.

자정, 새해 첫머리에 울려오는 종소리를 이엄이엄 라디오로 듣는 흥겨움 말이다.

제일 먼저 종로 보신각의 인경 소리다. 밧줄로 가로 달아맨 대여섯 자 길이의 나무토막을 휘영청 뒤로 잡아당겼다가 인경 배때기에 하고 부딪치는 것이다. 인경은 몸부림치며 운다. 와글와글 떠드는 시민들 소음을 뚫고 그 신음소리는 온 장안에 퍼진다. 몸집에 비긴다면 자못 빈약한 소리라고 느낀다.

뒤를 이어 경주의 에밀레 종소리, 낙산사[1]의 맑고 세밀한 종소리, 해인사, 범어사[2], 신계사[3], 월정사[4] 등등의 종이 울린다. 꼭 같은 음색(音色)은 하나도 없다.

모두가 ’()에 속한 소리의 색깔이다. 서양 종들의 댕그랑 땡땡하는 금속성 째지는 소리와는 대조적이다. 신음소리 같이 - 그러나 장중한 무게를 가진, 그 심연에서 솟아오르는 거룩한 탄식은 우리 역사의 소리다.

서양 사원들의 종소리, 노틀담 사원의 종소리, 모두 도레미파의 음계로 분해되어 풍금처럼 울린다. 그러나 우리 사원들의 종소리는 하나로 융합된 음향이다. 궁ㆍ상ㆍ각ㆍ치ㆍ우 다섯 원음만이 아니라 그 밖에 각가지[5] 음향이 합쳐서 한 소리로 울린다. 그 소리는 그대로 영원을 담아 보낸다. 그 소리 자체보다도 그 여운이 아름답다.

웅웅웅웅소리에 소리가 이어 갈수록 잔잔해지다가 마침내 그 명주실 마감 음파가 영원에 감추이는 순간 우리는 심장의 고동이 멎는 간지러움을 느낀다.

서양에서의 제야는 뭐랄까? 일종의 발광이랄까? , 미친 춤, 양재기 대야 등등 닥치는 대로 두들겨대며 광난증을 피운다. 우리 교회에서는 제야를 반성과 기도로, 새해 첫 새벽을 예배로 보내지만 그건 우리 교인만의 일이다.

그러나 동양의 시인들은 제야를 슬퍼했다.

 

일년 처음에 일년 봄은 있어도, 백년 그 안에 백살 인간 없나니, 꽃밭 그 속에 몇 번이고 취해보자. 가난한들 어떠리 만량 술 사련다.”[6]

(8세기 중국 시인 최민동)

 

제야는 귀양간 분들이 고향 그리는 밤이기도 하다.

 

여관 찬 방

등잔불 돋우고

 

잠 못 이루는

나그네 마음

 

오늘밤 고향

생각은 천리

 

내일 아침 귀밑에

서리낀 또 한해

 

이렇게 시인들은 제야를 슬퍼했다. 그러나 새해는 역시 새해여서 즐거워 하는 날, 아이들은 세뱃돈에 부풀고, 어른들은 세배 받고 흐뭇하다. 도소주 한잔 향기롭기도 하고. ……


[각주]

  1. 낙산사(洛山寺) - 1)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오봉산(五峰山)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의상이 창건한 사찰(671, 문무왕 11). 2) 옛 경기도 장단군 용암산(湧巖山)에 있었던 삼국시대 신라 시기의 사찰.
  2. 범어사(釜山 梵魚寺)는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금정산에 있는 사찰이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14교구 본사이며 태고종 교계에 속한다. 양산 통도사(불보사찰), 합천 해인사(법보사찰), 순천 송광사(승보사찰)와 더불어 한국 삼보사찰로 불리고 있다.
  3. 신계사(新溪寺) - 강원도 고산군 외금강면 금강산(金剛山)에 있었던 삼국시대 519(법흥왕 6)에 신라의 승려 보운이 창건한 사찰.
  4. 월정사(月精寺) - 1)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오대산(五臺山)에 있는 삼국시대 643(선덕여왕 12) 신라의 승려 자장율사가 창건한 사찰. 2) 북한 황해남도 안악군 구월산(九月山) 아사봉(阿斯峰)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제46대 문성왕 당시(846, 문성왕 8) 창건한 사찰. 북한문화재.
  5. 각가지 각각 다른 여러 가지
  6. 최민동(崔敏童)盛唐(성당 - 당제국이 경제와 문화 등 전반적으로 모든 면에서 번영의 전성기를 누렸던 시기)의 시인으로 山東省 聊城市(산동성 요성시) 서쪽 博州(박주) 사람이고, 아버지는 冀州刺史 庭玉(기주자사 정옥)이고, 형이 惠童(혜동)이다.
  7. 이 시는 사촌형 혜동의 별장에서 열린 연회에서 지은 시로 이 시대에는 약간 자조적인 향락 사상이 있었는데, 이러한 기분은 당시 문단의 일부에 유행되고 있었다고 한다.
    一年始有一年春(일년시유일년춘) - 일 년의 처음에 한 해의 봄이 있지만
    百歲曾無百歲人(백세증무백세인) - 백 살이 되도록 산 사람은 없도다
    能向花前幾回醉(능향화전기회취) - 꽃을 향하여 여러 번 취하리니
    十千沽酒莫辭貧(십천고주막사빈) - 값진 술 사자꾸나, 가난 탓 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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