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1월 25일 목요일

[범용기 제5권] (86) 요꼬하마에 - 슬픈 인정의 한 토막

[범용기 제5] (86) 요꼬하마에 - 슬픈 인정의 한 토막

- 경도에서 -

 

46() - 경도교회 양형춘[1] 목사 안내로 그의 교인 가정을 방문했다.

고 윤하영[2] 목사님 손주되시는 분이란다.

그의 부친은 이북에 계신데, 생사를 모르지만, 오늘이 생신날이기에 거저 지낼 수 없어 생일축하 겸 기도의 모임을 열었다고 했다.

어느 호텔 중국식당에 직계가족 전원이 모였다.

양형춘 목사 사회로 내가 설화했다.

내가 그 옛날에 윤하영 목사님의 프린스턴 신학교 동창이었다는 인연 때문에 나를 일부러 초대한 것이다.

김재술 장로가 사돈으로 동석했다.

이 한 장면도 우리 민족의 비극이다.

한 시간이면 날아갈 고장에서 부친의 생사도 몰라, 그분의 생일잔친지, 추도예밴지 분간 못할 모임을 갖게 된다는 슬픔이 심장을 찌른다.

일본 있는 그의 가족들은 모두 기독신자로서 일터의 신임을 받고 있다 한다.

4대 교인들이라, 이제는 기독교가 그들의 가정종교로 깊이 뿌리를 내렸다고 보았다.

오후에는 유석준 장로가 앞장 서서 아라시야마”(嵐山)를 봤다.

사꾸라는 아직 이르다.

명치 시대의 일본 문장가들이 아라시야마를 가리켜 꽃구름이라 했지만 과장 표현이었다고 생각한다.

거기 죽림 속 산장에서 水豆腐”(수두부)의 향연을 받고 돌아오는 길에 히가시야마”(東山) 꼭대기까지 올라가 경도[3] 전경을 내려다보고 숙소에 왔다.

돌아오는 길에 빛의 턴넬이랄 수 있는 야시장을 걸었다.

싸우나탕에서 피곤을 풀고 양식점에서 가벼운 양식으로 저녁식사를 땠다.

돌아와 양형춘 목사 객실에서 유숙했다.

양형춘 목사는 시정(詩情)이 꽃피는 심장의 소유자다. 한신 출신인 박수연군의 유고(遺橋)를 모으고 있었다.

박수연 군은 다방면의 수재였는데 요절(妖絶)했다.

 

[각주]

  1. 양형춘 목사 - 대구에서 교목으로 사역을 시작하여 계명대학교 교수, 교회를 개척(대구 청산교회)하고, 일본, 캐나다, 미국에서 사역하였다. 부인 장세정, 아들 양상진 목사(교토남부교회), 딸 양애경(오사카교회 정연원 목사 사모), 사위 정재식 목사(시모노세키교회).
  2. 윤하영(尹河英, 1889~1956) - 어려서부터 한문을 배웠으며 1905년 선천주재 북장로회 선교사 램프(南行里) 선교사의 전도를 받아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는 램프 선교사의 조사가 되어 가산교회 등지에서 시무하였다. 이후 선천고등성경학교에 입학하여 3년동안 수학한 후 1916년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했다. 191931운동과 관련하여 1년 정도 옥고를 치루고 1921년 졸업(14)하였다. 그해 평북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고 용천군 용계동교회에 부임하여 시무하였으며 1923년에는 광화, 덕동 2교회 위임목사로 부임하였다. 그러나 얼마되지 않아 중국으로 건너가 남경대학에 적을 두고 상해 임시정부를 도와 군자금 모금운동에 앞장서게 되었다. 1924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프린스턴신학교에서 신학공부를 하였다. 1929년 귀국 후 신의주제일교회에서 시무하였고, 1939년에는 총회장에 선출되었다. 신사참배와 창씨개명 반대 등으로 1941년 구속되어 6개월간 옥살이를 겪었다. 이때 그는 목사직도 박탈당하였다. 해방과 함께 다시 신의주제일교회 목사로 복직된 그는 신의주제이교회 한경직 목사 등과 함께 평북의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한국 최초의 정당인 기독교사회민주당19459월에 창당하였다. 그러나 소련군의 진주와 공산당 정권의 득세로 그와 정당에 탄압으로 인하여 1947년 월남하여 미군정청의 요청으로 충청북도 도지사가 되어 남한에서 민주정부 수립에 참여하게 되었다.
  3. 교토시(일본어 : 京都市)는 일본 혼슈 중앙부에 있는 일본 10대 도시중 하나이다. 한국 한자음은 경도시라고 읽는다. 인구는 약 150만 명이고 예전에 일본의 수도였다. 현재는 교토부(京都府) 중앙부에 있는 부청 소재지이고, 게이한신 도시권의 일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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