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2월 1일 수요일

[범용기 제5권] (122) 요꼬하마에 - 能辯者(능변자)

[범용기 제5] (122) 요꼬하마에 - 能辯者(능변자)

 

추호전영택[1] 목사님은 글에는 능하지만 말은 잘하는 축이 아니었다. 장덕수[2] 씨는 雄辭健筆’(웅사건필)이라고들 했다. 말하자면 연단에 오르면 웅변가요, 글을 쓰면 명문장이란 뜻이겠다.

31운동 다음 해에 필자도 어떤 보이잖는 손에 이끌려 서울에 왔다.

새로 부임한 일본의 해군대장 제등실”(사이또오 미노루)[3]문화정치를 한다고 선언했다. 덕택에 동아일보도 생겨나고 조선일보, “개벽잡지, “동광등등이 데뷰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무럽에 장덕수 씨가 귀국하여 첫 학술강연을 했다. 제목은 루쏘민약론강해였다. “강연이라는 성질의 것이어서 웅변은 격에 맞지 않았기 때문에 차근차근 풀이해 나간다. 그래도 말솜씨가 능숙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후에 여운홍[4] 씨가 미국으로부터 귀국하여 정동에서 귀국강연을 했다. 그는 웅변을 토했다. 그러나 내 머리에 남는 것은 없었다.

여운형[5] 씨가 귀국했다. 그는 진짜 웅변가로 이름난 분이니만큼 웅변으로 청중을 사로잡는 것이었다. 함북 은성 출신인 박일별 씨, 서울의 김창제[6] 씨 등 모두 웅변가로 첫 손가락에 꼽히는 분들이었는데, “의 알맹이보다도 말하는()이 돋보여서 공허를 안겨주는 경우가 많았다. 말 잘하는 사람은 말이 쉽게 쏟아져 나온다. 그래서 말이 많아진다. 말이 을 향해 압축되는 대신에, 둘레를 향해 확산된다. 연상 작용이 번갯불 같아서 말은 꼬리에 꼬리가 달린다. 그 꼬리가 길면 구미호”(九尾狐)가 될 우려도 없지 않다.

미국의 리건대통령은 신랄한 정치평론 배우였다는데 그 명성이 영화를 타고 천하에 퍼져서, 진짜 대통령이 됐단다. 말하자면 정치배우 대통령이랄 수도 있겠다.

그가 등장한 무대는 1932년 푸랭클린ㆍ루즈벨트가 나서던 때와 비슷하게 꾸며졌다. “경제공황의 검은 이 겹겹으로 둘린 어두운 무대였다.

푸랭클린 루즈벨트는 뉴우띨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는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대책을 발표하면서 이렇게 하면 됩니다”, “당신들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합시다하고 연설했다. 필자는 그때 피쯔벅에 있었는데 그 입후보 연설하는 날 아침에 귀국의 길에 올랐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후에 그는 그대로 하여 미국 경제를 재건했던 것이다. 어제 저녁 T.V.기자의 리건평을 듣건대는, 프랭클린은 “You can do it”이란 네 마디 단어만으로 이겨냈다고 한다.

짜임새 없는 허술한 선동 연설이나 하고 돌아다니는 것 같은 리건의 유세(遊說)에 대한 평인 것 같았다.

방대한 군부 예산은 그대로 살리면서 평화산업, 지방예산 교육비 등은 돌아가며 삭감함으로 수지를 맞추려는 근본 시책에 대한 불평이기도 한 것 같다. 그러면서 말은 청산유수다. 발음도 정확 명백하여 영어에 덤덤한 사람으로서도 또박또박 귀에 담을 수 있다.

말 잘하는 대통령이자, 말 많은 대통령임에 틀림없겠다. 알맹이 없는 말은 바람에 날려가는 벼깍대기[7] 같아서 허망스러워 진다. 실업자 4천만이 아귀”(餓鬼)되어 아우성치면 굿하는 정도로서는 해결될 수 없을 것이다.

 

[각주]

  1. 전영택(田榮澤, 1894~1963) - 목사, 소설가, 호는 늘봄(그가 창조 창간호에 장춘(長春)이란 필명으로 작품을 발표한 바 있는데 이것이 후에 늘봄이란 호로 쓰였다), 추호(秋湖), 불수레. 평양 사창골(社倉谷)에서 전석영의 3남으로 출생. 1910년 평양 대성중학교를 3년 수료한 뒤 진남포 삼숭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1912년 도일하여 토오쿄오 아오야마(靑山)학원 고등부 문과를 거쳐 동대한 문학부에 입학, 1918년 동교를 졸업했다. 이어 그해 동대학 신학부에 편입하면서 김동인, 주요한, 김환 등과 함께 한국 최초의 순문예지 <창조>의 동인으로 참가했다. 이듬해 2월에 창간된 창간호에 처녀작 <혜선(惠善)의 사()>를 발표하였다. 그해 31운동이 일어나기 전 토오쿄오에서 먼저 진행된 유학생 독립선언에 참여하였고 곧 귀국하여 채혜수(蔡惠秀)와 결혼하였다. 1921년 아오야마학원 신학부에 복교하여 이듬해 졸업하였고, 곧 서울 감리교신학교 교수로 부임하였다. 1927년 아현교회에서 목회를 하다가 1930년에는 미국에 유학을 하여 퍼시픽신학교에 입학했다. 미국에서 흥사단에 가입, 독립운동에도 헌신했으며 1932년 퍼시픽신학교를 수료, 귀국하였다. 곧 기독교 문서사업에 뜻을 두어 교계 잡지 <새사람>을 발간하였다. 그리고 이용도ㆍ이호빈 목사 등의 예수교회 운동에도 크게 관여했고 그 기관지 <예수>의 편집, 발행을 돕기도 했다. 일제말기에는 평양근교에 은거하면서 평양여자고등성경학교에서 가르치기도 하고 작은 교회에서 목회하기도 하였다. 해방 이후 1945년 조선민주자 문교부장, 1946년 미군정 문교부 편수관, 1947년 국립맹아학교장, 1948년 중앙신학교 교수, 1952년 토오쿄오 <한국복음신보> 주간, 1954년 대한기독교서회 편집국장 등을 차례로 역임하면서 정계ㆍ관계ㆍ교육계ㆍ언론계ㆍ출판계 등에서 다양한 활동을 폈다. 1961년에 한국 문인협회 초대 이사장에 취임했고 단편 금붕어로 서울시 문화상(문학부문)을 수상했으며 1963년 대한민국 문화포상 대통령장을 수상했고 이후 기독교 계명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1968116일 교통사고로 별세했다.
  2. 장덕수(張德秀, 1894~1947) - 호는 설산(雪山). 일본 와세다대학 정경학부를 졸업(1916)하고, 귀국하여 상해로 건너가 여운형 등과 독립운동을 논의하였다. 1918년 신한청년단 결성에 참여하고, 1919년 국내에 잠입하였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주거제한 처분을 받았다. 1920동아일보부사장이 되었다. 1923년부터 미국으로 건너가서 허정과 함께 삼일신보를 발간하기도 하였으며, 1936년에 컬럼비아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친일단체에서 활동하면서 일제의 침략전쟁을 지지하였다. 해방 이후 송진우와 함께 한민당 창당을 주도하고, 우파 활동을 하였다. 1947122, 자신의 집에서 현직 경찰과 학생에게 암살당하였다.
  3.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1858~1936)는 일본 제국의 해군 군인이자 관료, 정치인이다. 해군병학교를 졸업한 후 미국에서 유학한 자수성가형 인물로, 해군 대장과 해군 대신을 지냈다. 1919년부터 1927년까지 제3, 1929년부터 1931년까지 제5대 조선총독부 총독으로 근무했다. 19199월 조선 총독으로 부임하러 조선의 남대문역에서 내리다가 강우규 등의 폭탄 습격을 받았으나 구사일생으로 죽음을 면하였다. 3·1운동 이후 조선 총독으로서 종전의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치로 통치 방법을 전환시켜 식민지 반발을 무마하려 노력했다. 1925년에 자작이 되고, 1932년부터 1934년까지 내각총리대신, 1932년부터 1933년까지 겸임 외무대신을 지냈다. 1933년 겸임 문부대신을 지내다가 1934년 사퇴하였다. 이후 내대신으로 재직 중 1936226일에 발발한 2·26 사건에 가담한 청년 장교들에 의해 암살되었다.
  4. 여운홍(呂運弘, 1891~1973) - 경기도 양평 출생. 본관은 함양(咸陽). 호는 근농(勤農). 아버지는 여정현(呂鼎鉉)이고 어머니는 경주 이씨이며, 여운형(呂運亨)의 동생이다. 부인 김창희와의 사이에 여성구(呂聲九)ㆍ여명구(呂明九) 두 아들과 여견구(呂絹九)ㆍ여정구(呂貞九) 두 딸을 두었다. 1909년 중앙중학교를 거쳐 1910년 경신학교(儆新學校)를 졸업하고, 1913년 미국으로 유학하여 1918년 오하이오(Ohio)주의 우스터(Wooster)대학을 졸업하였다. 191931운동이 일어난 후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상해임시정부의 수립에 참여하고,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였으며, 1920년 미국의원단이 중국을 방문하자 임시정부의 교섭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1년까지 상하이에 설립된 인성학교(仁成學校)의 교장을 지냈다. 1921년에 귀국하여 1922년부터 1925년까지 보성전문학교의 영문학 교수를 지내고, 1927년부터 1939년까지 미국에 본사를 둔 싱거(Singer)미싱회사의 조선감독원을 지냈다. 1941년 일제 침략전쟁의 협력단체인 조선임전보국단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으며, 일제의 침략전쟁을 지지하는 내용의 강연을 여러 차례하고 잡지에도 친일의 글을 기고하였다. 해방 후에는 친형 여운형과 같이 조선건국준비위원회와 조선인민당에서 활동하였다. 1946년 민주주의민족전선(民主主義民族戰線)의 외교대책전문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5월에 조선인민당의 독자성 회복을 주장하며 당을 탈당하고, 사회민주당을 결성하여 대표가 되었다.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의 관선의원으로 선임되어 내무경찰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47년 민족자주연맹(民族自主聯盟)의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으며, 19484월에 평양에서 개최된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에 참석하였다. 귀환한 후 통일운동의 역량 결집과 민족문제의 자주적 해결을 목표로 결성된 통일독립촉진회(統一獨立促進會)의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505월에 실시된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경기도 양평에서 입후보하여 당선되었고, 자유당 선전부장으로 활동하였다. 1960년 제5대 참의원에 당선되었고, 1961516군사정변으로 의원자격을 상실하였다. 1963년 민주공화당에 입당하여 자문위원과 고문을 지냈다. 197323일에 사망하였다. 저서로는 영문법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이 있다.
  5. 여운형(呂運亨, 1886~1947) - 호는 몽양(夢陽). 경기도 양평 출신. 1908년 미국인 선교사 클라크(Clark. C.A.) 목사의 조수로 있으면서 당시 계몽운동을 주도하던 승동교회를 출입하였다. 1911년 강릉에서 남궁억의 후원으로 운영되던 초당의숙의 교사가 되어 청년 교육에 힘썼다(1911년부터 2년간 평양신학교에 다녔다). 1914년 난징의 금릉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1917년부터 상해에서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1919년 상해 임시정부 수립에 힘썼으며, 1920년 사회주의 계열에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1925년 쑨원의 권유로 중국국민당에 가입하여 중국혁명운동에 참여하였다. 1933년 조선중앙일보사 사장직에 취임하였고,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신문이 폐간되어 사장직에서 물러났다. 1944년 일제의 패망을 예상하고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하였고, 광복이 되자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주도하였다. 혼란한 정국 속에서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하면서 통일정부 수립에 노력하다가 1947719,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한지근에게 저격을 당해 서거하였다.
  6. 김창제(金昶濟, 1880- 1957)는 일제 강점기와 한국의 YMCA 운동가, 기독교 교육자, 사회사업가, 문필가이다. 1918년 함흥 YMCA 창설을 주도하였고, 이화여전과 YMCA 학관에서 교사로 봉직하였다. 중앙 YMCA와 경성YMCA의 이사를 역임했다. 19193.1 운동 당시 미신과 허황된 선동이 있음을 들어 참여를 거부하였다. 한편 독립운동에 참여하기를 거부하여 일부 지식인층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상당수 글과 칼럼, 강연활동을 통해 일제 강점기 중반 이후 기독교계의 대표적인 문필가로 활동하였고, YMCA 일요강좌 등 각종 강연회를 통해 청년 학생층에게 인기가 높았다. 1934년 과학데이실행회 위원장과 조선어학회 표준어 사정위원으로 활동했다. 1920년부터 1924년까지 개성 송도고보와 호수돈여고보의 교사로 봉직하다가 19247월에 이화여자중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국어와 역사를 가르쳤고, 19393월 정년으로 퇴직하였다. 1923년부터 전개된 한국농촌운동에는 핵심위원이 되고, 경성YMCA 이사와 중앙YMCA연합회 이사로 활동했다. 1926년에는 이화여자전문학교 국어교사로 출강하였다. 1933년 잡지 과학조선(科學朝鮮)의 필진 겸 편집고문이 되었다. 193475일 서울 태서관(太西館)에서 이인(李仁), 김용관(金容瓘), 박길룡(朴吉龍) 등 발명학회 간부들과 서울시내 중등학교 교사 등 100여 명 등과 함께 과학지식보급회(科學知識普及會)를 창립하였다. 8.15 해방 이후에는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로 추대되었다. 그는 일생을 강직하게 살다가 1957114일에 사망했다.
  7. 깍대기 - ‘깍지’(콩이나 팥 따위의 꼬투리에서 알맹이를 까낸 껍질)의 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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