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2월 1일 수요일

[범용기 제5권] (124) 요꼬하마에 - 춤을 잃은 민족

[범용기 제5] (124) 요꼬하마에 - 춤을 잃은 민족

 

우리 민족에게도 춤은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있기는 하다. “강강수월래파계승의 고민을 춤추는 승무니 농악 춤이니, 무당춤이니, 봉산 탈춤이니 하는 등등이 남아 있기는 하다.

유동식 박사의 민족종교와 한국문화란 저서에 의하면, 우리 민족에게는 축제풍습이 한 옛날부터 뿌리 깊게 전승되었다는 것이다.

고구려의 동맹’(東盟), 부여의 영고’(迎鼓), 동에의 무천’(舞天), 의 소도제(蘇塗祭) 등등이 있어서 축제날에는 전 부락민이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며 밤새도록 즐겼다고 한다. 고려조에 와서는 위에 열거한 여러 가지 축제를 한데 묶어 팔관회(八關會)를 만들고 불교의 관등(觀燈) 놀이까지 곁들여 종교적인 카니발[1]을 즐겼다고도 한다.

이조에 와서는 유교가 국교 노릇을 하게 되면서 모두가 점잖은 선비로 자신을 분장(粉裝)하려 했다. 소년 시절에 벌써 어른 구실을 하려든다. “조로증[2]에 걸린다. 아이들까지도 까불고 뛰고 재재거리고[3] 뛰노는 자유를 잃었다.

은실 달빛, 잔잔한 光波(광파)에 싸여 흥겨운 群舞(군무)에 밤새이던 민중의 즐거움은 증발됐다. 그리고 일 년에 두어번 대성전[4]석전[5] 때에 국악단의 아악 연주가 억지로 남아있는 정도다. “아악은 너무 템포가 느리고 기분이 유장하여[6], “서민의 음악으로서는 맞을 것 같지 않다. 춤도 몸놀림이 너무 더디어서 답답증이 앞선다.

요컨대, 그것도 양반층의 구경에 국한된 연기였다. 양반 자신들은 관객의 선을 넘지 않는다. 그들이 춤이나 노래에 섞여 들지는 않는다.

가난하고 쪼들리고, 육중한 연자마[7] 틈에 끼어 터지고, 부서진 민중에게 무슨 춤이 있고 노래가 있겠느냐 할 수도 있을 법하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 같지도 않다.

우크라이나농민들은 러시아인에게 농노같이 천대받고 농토가 다른 러시아 지주에게 팔리며는 그 농토에 덤으로 붙여 팔려가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크라이나인들은 군무를 춤추며 즐겼다. 캐나다에 옮겨와서도 그들은 대대손손 그들의 민속춤을 전지전승”,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청교도들이 총 갖고 아프리카 대륙에 기어올라 야수사냥 하듯 흑인족을 무더기로 잡았다. 발목, 손목에 쇠고랑 채와 목선에 실어왔다. “보스톤의 노예시장에서 경매했다. 흑인은 짐승이고 물건이고 재산이지 인간은 아니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 미 대륙에서의 흑인들을 보라! 쾌활하고 농담 잘하고 체력은 세고 운동경기에 특재가 있고, 호콩 속에서 수백 종의 특용품을 발견한 죠오지ㆍ워싱턴ㆍ허비같은 분도 났다. 천하무적의 권투선수도 났고, “슈퍼스타의 농구, 야구 선수들도 수두룩하다. 지금 젊은 세대의 매혹적인 춤과 노래도 주로 흑인족의 영역이라 하겠다.

환경이 우리에게 도전한다. 우리는 이에 응전한다. 응전태세가 우리의 운명을 만들어 낸다. 흑인족은 미국에서 용감하게 응전했다. 응전의 과실(果實)을 재투자하여 도전한다. “관계에서 흑인시장도 나왔고 유엔 미국대사로도 뽑혔었다.

그들은 곤고 가운데서도 춤추고 노래하며 일한다. 그들은 결코 좌절되지 않는다. 자신들의 생존과 발전을 위하여 용감하게 지혜롭게 싸운다. 그들은 미국 역사에 정면으로 충돌하지 않는다. 적응하면서 항전한다.

아메리카 인디안족의 강경 일변도와 게토사회 습속에는 동조하지 않는다. 그들은 춤추며 노래하며 즐겁게 유흥기분으로 싸운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 한국 민중에게서 노래와 춤을 사그라지게 한 것은 유교 지도자들의 젊잖음 빼는 근엄”(謹嚴) 습성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성 싶다.

우리는 노래와 춤을 되찾아야 되겠다. 기독교는 노래를 갖고 들어왔다. 그러나 금단의 과일이었다. 그런데 찬송의 노래에도 문제가 있다. 그 노래의 작사자 작곡자가 모두 서양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우리의 심금에는 자연스레 맞아들지 않는다.

필자는 815 해방 직후에 기독교가 우리민족 종교로 되고, 찬송가가 우리 노래의 뉴앙스를 품겨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사실, 개편 찬송가에는 우리 교우들이 작사 작곡한 것이 적잖이 끼어있다.

성가 전공에 일생을 바친 나운영 박사, 박재훈 박사, 곽상수 박사, 박태준[8] 박사, 장수철[9] 박사 등 선각자의 공헌은 간과할 수 없겠다.

 

이제 개편 찬송가 중에서 우리 성가 전문가들이 작사 작곡한 것만을 뽑아보면 아래와 같다.

 

(1) 237: “어서 돌아오오는 전영택[10] 작사ㆍ박재훈 작곡의 것이고, (2) 27: “우리 예배를 받아주소서는 김정준 작사ㆍ곽상수 작곡이고, (3) 55: “잠들기 전에는 서정운 작사ㆍ곽상수 작곡이고, (4) 61: “주는 나의 목자는 최봉춘 작사ㆍ장수철 작곡이고, (5) 86: “구주 예수 예수 나셨다는 임성길 작사ㆍ장수철 작곡의 것이고, (6) 172인생을 건지신 예수는 마경일 작사ㆍ박태준 작곡의 것이고, (7) 212교회의 노래는 김재준 작사ㆍ이동훈 작곡이고, (8) 213하나의 세계는 홍현설[11] 작사ㆍ안신영 작곡이고, (9) 321외로운 배 한척은 김활란 작사ㆍ이동훈 작곡이고, (10) 337생명을 주는 길은 반피득 작사ㆍ나운영 작곡이고, (11) 379죽도록 충성하라는 정용철[12] 작사ㆍ이유선 작곡이고, (12) 387부름 받은 몸은 이호운[13] 작사ㆍ이유선 작곡이고, (13) 401믿는 자여 어찌할꼬는 석진영 작사ㆍ박재훈 작곡이고, (14) 402일하러 가세는 남궁억 작사ㆍ이동훈 작곡이고, (15) 461주님의 은혜라는 안신영 작사ㆍ김두완 작곡이고, (16) 463참사랑 하오리다는 정용철 작사ㆍ곽상수 작곡이고, (17) 473귀한 주의 사랑은 박태준 작사ㆍ작곡한 것이고, (18) 482주와 함께 살리라는 이호운 작사ㆍ박태준 작곡이고, (19) 488하늘가는 길은 소안련 작사ㆍ안신영 작곡이고, (20) 533어머니 날은 주요한 작사ㆍ구두회[14] 작곡이고, (21) 538감사절 찬송은 임옥인 작사ㆍ박태준 작곡이고, (22) 545우리 집은 전영택 작사ㆍ구두회 작곡이고, (23) 546주의 가정은 문익환 작사ㆍ곽상수 작곡이고, (24) 565부름받은 젊은이는 반병섭[15] 작사ㆍ이동훈 작곡이다.

 

한국인의 찬송가 작곡이 찬송가의 본류에서 이탈된 것은 아니지만, 역시 서양인의 작곡에서 느낄 수 없는 한국적인 뉴앙스가 있어서 정서의 Depth[16]에 올린다. 그점은 나운영 박사의 작곡에서도 여실하게 느낄 수 있다. 그 싹을 키우자는 것이다.

이화대학 음악과 작곡 교수로 있던 조병옥 여사가 서독에 산다. 그 분은 새찬송가 작곡에 정진한다. 종종 서독 사람들 모임에서 발표하기도 한다. 듣고 난 서독 인사들 중에는 그게 서양 곡조지 어디 너희 곡이냐고 따지는 사람들이 적잖게 있다고 했다. 역시 서독인들은 한국 특유의 멋을 듣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진짜 한국적이면서 세계적인 찬송의 노래가 많이 작사 작곡되야 하겠다.

성탄절이 오면 의례 헨델메시야를 듣는다. 하늘 영광을 본다. 신자의 행복을 느낀다. 그러나 역시 서구적이다. 한국 기독자들도 역사 안에서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의 영광을 체험한다. 이제부터는 한국 멋 섞인 메시야찬가가 한국에서부터 전 세계에 울려퍼질 애넌시에이션이 들려오는 것 같다.

 

춤은 어떤가? 교회당 안에서, 강단에서 어른들이 춤으로 예배할 수 있을까? 한국에서는 10여 년 전부터 이것을 시도해 봤다. 그러나 성역을 모독한다는 청교도극성이 좀처럼 해방되지 않는다는 것 같다. 어린이들의 발레식무용은 전부터도 문제 밖이었으니 지금도 그럴 것으로 짐작된다.

필자는 31운동 다음해에 서울 승동교회당에서 어린이들이 연출하는 열세 집이라는 가극(?)을 본 일이 있다. 승동예배당은 초만원이었다. 때가 때니만큼, 어른들은 통곡하며 듣는다. 나라 없는 어린 것들이 13도를 상징한 열세 가닭의 채색줄을 제각기 한 줄씩 쥐고, 한 기둥에 얽혔다 풀렸다 하며 열세 집을 노래할 때, 어른들 눈에서 눈물이 없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저 순진한 어린 것들이 비극을 가슴 깊이 안고 평생을 망국민으로 일인의 뿔떡”(투견)에게 물리고 일본 상인의 거마리[17]에게 피를 빨려야 하겠으니, 통곡 통곡해도 시원치가 않았던 것이다. 누구의 웅변이 이 아이들의 발레극보다 더 감동적일 수 있겠는가?

으로서의 연출은 성당인 승동교회당과 성단이라는 그 교회 성소에 던져진 영광이었고 결코 모독이 아니었다.

카톨릭의 미사도 상징적인 성극이요, 신교의 찬양대도 소리로서의 성극이다.

위에서 말한바와 같이 옛날의 우리 민족은 춤추는 민족이었다. 민중에게서 춤을 증발시킨 것은 노쇄증에 걸린 유교의 노쇄문화 때문이었다. 젊은 기독교에서마저 조로증에 걸릴 필요는 없겠다. 친교의 시간에 한때 원무(圓舞)로 사귄다면 잡됨 없이 서로 가까워질 것이 아니겠는가?

한국에서의 목요기도회 그룹 사람들은 예배하고 증언하고, 모두 모두 손잡고 평안을 나누고서 한참 춤춘다. 유학자들처럼 굳어진 얼굴이 아니다. 웃고 서로 놀리고 남녀 모두 형제자매가 되어 막힌데 없다. “난잡속에 질서가 있다. 농담 속에 메시지가 있다.

그렇다고 그들이 기성교회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기관과 교회사업에 충성으로 봉사한다. 교회와 그룹이 그리스도의 정의로운 사랑으로 한 몸을 세운다. 제도적인 교회가 강제로 해산돼도, 그룹은 누룩같이 남아 더 아름다운 하늘나라를 자래울[18] 것이다. 그들에게는 좌절이 없다. 춤추며 노래하며 하늘나라를 땅에 세운다. 우리 민족 모두가 잃었던 노래와 춤을 되찾자!

 

[각주]

  1. 카니발(carnival) - 주로 서양에서, 가장행렬 등이 있는 떠들썩한 행사나 축제
  2. 조로증(早老症) - 선천적인 뇌분비계의 발육 부전으로 인해 생기는 병. 몸이 작고 치모(恥毛)가 없으며, 피부에는 주름이 많고 흰 털이 많아서 외관이나 행동은 노인같이 보인다. 영국의 의사 H. 길포드가 처음 보고하였다.
  3. 재재거리다 - 조금 수다스럽게 자꾸 이야기하다
  4. 대성전(大成殿) - 문묘에서 공자의 위패를 모신 전각
  5. 석전(釋奠) - 음력 2월과 8월의 상정일에 문묘에서 공자를 비롯하여 신위를 모시고 있는 41018현을 제사지내는 의식
  6. 유장하다 - 여유가 느껴지고 느릿하고 편하다
  7. 연자마(硏子磨) - 돌로 만든 방아의 하나. 둥근 돌판 위에 그보다 작고 둥근 돌을 옆으로 세워 얹은 것으로, 이것을 소나 말이 끌어 돌려서 곡식을 찧고 빻는다.
  8. 박태준(朴泰俊, 1901~1986)은 대한민국의 클래식 오르간 연주가 겸 작곡가이다.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경상북도 대구에서 출생하여 지난날 한때 경상북도 경주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대구 계성고등보통학교를 나온 이후 미국 터스컬럼 대학교와 웨스트민스터 합창대학 및 동 대학원을 나왔다. 귀국 후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수를 거쳐 연세대학교 종교음악학과 창설을 하였으며, 많은 작곡을 하여 한국 음악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예술원 음악공로상과 국민훈장 무궁화장 등을 받았다. 1964년 연세대학교 음대 학장을 지냈다. 작품으로 계명대학교 교가〉 〈오빠생각〉 〈집 생각〉 〈사우(思友)150여 곡이 있고, 동요곡집으로 중 중 때때중, 가곡집으로 박태준 가곡집등이 있다.
  9. 장수철(張壽哲, 1917~1966)은 대한민국의 작곡가, 지휘자, 종교음악가, 합창단 지휘자이다. 명예음악박사. 본관 인동(평양 대동군 율리면 석정리 출신). 숭실대학교, 중앙신학교(현재의 강남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았다. 아명(兒名)은 장봉주(張鳳柱), 부친 장시욱과 모친 이화정의 5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 1960년 선명회어린이합창단을 월드비전의 밥 피얼스((Bob Pierce) 박사와 함께 창단하였다. 그가 처음으로 어린이 합창에 도입한 두성발성은 이 후 한국 어린이 합창의 중요한 발성법으로 자리잡았다. 또한 그가 작곡하고 부인 최봉춘 여사가 작사한 "탄일종"과 찬송가 "주는 나를 기르시는 목자"는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찬송가가 되었다.
  10. 전영택(田榮澤, 1894~1963) - 목사, 소설가, 호는 늘봄(그가 창조 창간호에 장춘(長春)이란 필명으로 작품을 발표한 바 있는데 이것이 후에 늘봄이란 호로 쓰였다), 추호(秋湖), 불수레. 평양 사창골(社倉谷)에서 전석영의 3남으로 출생. 1910년 평양 대성중학교를 3년 수료한 뒤 진남포 삼숭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1912년 도일하여 토오쿄오 아오야마(靑山)학원 고등부 문과를 거쳐 동대한 문학부에 입학, 1918년 동교를 졸업했다. 이어 그해 동대학 신학부에 편입하면서 김동인, 주요한, 김환 등과 함께 한국 최초의 순문예지 <창조>의 동인으로 참가했다. 이듬해 2월에 창간된 창간호에 처녀작 <혜선(惠善)의 사()>를 발표하였다. 그해 31운동이 일어나기 전 토오쿄오에서 먼저 진행된 유학생 독립선언에 참여하였고 곧 귀국하여 채혜수(蔡惠秀)와 결혼하였다. 1921년 아오야마학원 신학부에 복교하여 이듬해 졸업하였고, 곧 서울 감리교신학교 교수로 부임하였다... 1927년 아현교회에서 목회를 하다가 1930년에는 미국에 유학을 하여 퍼시픽신학교에 입학했다. 미국에서 흥사단에 가입, 독립운동에도 헌신했으며 1932년 퍼시픽신학교를 수료, 귀국하였다. 곧 기독교 문서사업에 뜻을 두어 교계 잡지 <새사람>을 발간하였다. 그리고 이용도ㆍ이호빈 목사 등의 예수교회 운동에도 크게 관여했고 그 기관지 <예수>의 편집, 발행을 돕기도 했다. 일제말기에는 평양근교에 은거하면서 평양여자고등성경학교에서 가르치기도 하고 작은 교회에서 목회하기도 하였다. 해방 이후 1945년 조선민주자 문교부장, 1946년 미군정 문교부 편수관, 1947년 국립맹아학교장, 1948년 중앙신학교 교수, 1952년 토오쿄오 <한국복음신보> 주간, 1954년 대한기독교서회 편집국장 등을 차례로 역임하면서 정계ㆍ관계ㆍ교육계ㆍ언론계ㆍ출판계 등에서 다양한 활동을 폈다. 1961년에 한국 문인협회 초대 이사장에 취임했고 단편 금붕어로 서울시 문화상(문학부문)을 수상했으며 1963년 대한민국 문화포상 대통령장을 수상했고 이후 기독교 계명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1968116일 교통사고로 별세했다.
  11. 홍현설(洪顯卨, 1911~1990) - 호는 청암(靑岩). 평양 출생. 장로교 계통의 숭덕학교를 거처 1929년 감리교계 학교인 광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1933년 감리교신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 1935년 칸사이학원 신학부를 졸업하였다. 1년간 도시샤 대학 신학부에서 연구한 후 1936년 귀국, 1939년 서부연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42년 감리교신학교 교수로 부임했으나, 혁신교단의 노선과 갈등을 일으켜 교수직과 목사직을 박탈당했고, 광복과 더불어 목사직이 회복되면서 평양중앙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월남한 뒤 감리교신학교 교수로 부임하였으나, 1948년 미국에 유학하여 드류대학, 유니온신학교를 졸업하였다. 1953년 감리교신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1957기독교사상창간에 위원장으로 참여하였으며, 1965년 한국기독교연합회(NCCK의 전신) 회장, 크리스찬아카데미 이사장(1966-1970), 한국 YMCA전국연맹 이사장(1967-1970) 등을 역임하였다.
  12. 정용철(1918~2018) - 경북 영양군에서 정주부 목사의 아들로 출생했다. 일본 동경신학대학과 청산학원을 거쳐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목회학을 공부했다. 포항 흥해제일교회, 서울 신암교회와 워싱턴 한인연합장로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한 후 1983년에 은퇴했다. 찬송가 네 맘과 정성을 다하여서’(218), ‘이전에 주님을 내가 몰라’(597)을 작사하였다.
  13. 이호운(李浩雲, 1911~1969)은 감리교 목사로 191153일 평남 강동군 원탄면 상리에서 출생했다. 만주 용정의 연신중학교를 마친 후 교역에 뜻을 두고 19363월에 서울 감리교신학교를 졸업하였다. 월남 후 1947년부터 약 5년 동안은 서울의 중앙신학교 교수로 재직하였고 1950년을 전후해서 미국 유학에 올라 시카고 북부 에반스톤에 위치한 개럿신학대학에서 수학하였다. 귀국 후 곧 감리교신학대학 교수로 부임하였고 1958년부터는 대전감리교신학교 교장으로 봉직했으며, 연세대 신학과와 국제대학 등에서도 강의했다. 특히 그의 문학과 음악적 재질은 한국 찬송가에 큰 영향을 주었는데, 아펜젤러의 별세에 붙인 추모 곡의 가사를 즉석에서 지으면서 정평이 났다. 통일찬송가 355<부름 받아 나선 이 몸>(이유선 작곡), 493<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박태준 작곡)에 수록된 2편의 찬송시를 작사해 널리 애창되고 있다. 특별히 <부름 받아 나선 이 몸>은 모든 신학교에서 교가처럼 애용될 정도로 소명감을 표현한 힘찬 노래로 동남아 일대의 교회와 미국의 여러 교회도 이 곡을 번역, 찬송가로 부르고 있다. 19691월 별세해 정동감리교회에서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14. 구두회(1921~2018, 남산교회 원로장로) - 충남 공주읍 출생으로 평양요한신학교, 동경제국고등음악학교, 미국 보스톤 음악대학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캘리포니아 신학대학원에서 음악박사, 미드웨스트대학에서 교회 음악박사 학위를 받았다. 숙명여대 음악대학 교수, 대학원장, 교회음악협회 회장, 한국음악협회 협회장, 찬송가 위원회 등을 역임했다. 찬송가 사철에 봄바람 불어 잇고’, ‘어머니의 넓은 사랑등을 작곡하였다.
  15. 반병섭(1924~2017) - 만주에서 출생. 1965년 한국 찬송가 개편위원으로 활동하였고, 그가 작사한 가슴마다 파도친다는 찬송은 널리 알려져 있다. 1969년 시카고 루터교 신학대학원을 마치고 1970년 캐나다 밴쿠버 연합교회 목사로 부름을 받았다.
  16. Depth - 깊이, 심도, 수심, 정밀
  17. 거마리 - ‘거머리의 북한어
  18. 자래우다 - ‘기르다의 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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